조국을 위한 기도. 2025년 3월

3/9/2025 시애틀 드림교회 주일예배, 기도 조유신 형제님

주여 주여, 어찌해야 하나요? 지난 날의 감사도 희망도 밟혀버린 이 광장에서 엄마잃은 아기처럼 주여주여 소리쳐 부릅니다. 억울하고 분한 이 마음, 가장 아끼던 것을 빼앗긴 아이의 심정처럼 울분이 터집니다.

이스라엘의 아합왕보다 더한 악 앞에서 우리는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의 무당과 싸울 엘리야 선지자가 없습니다. 그저 저 바알과 아세라의 성전앞에 줄을 서서 환호하고 춤추는 정신 나간 자들만이 넘쳐납니다.

죄악에 눈을 감고 불의에 박수치는 저들을 벌하시옵소서. 더이상 한국교회에 마른 가지에 희망을 두지 마시고 그룻터기를 잘라 땔감으로 쓰십시오. 주여, 저 바알과 아세라의 무리들을 쓸어버리시고 새로운 씨앗을 심어 다시 시작하게 하소서.

그 나무는 더이상 아무 열매도 맺지를 못하옵나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그들의 혓바닥을 뽑아버리시고 그들의 탐욕의 눈을 멀게 하시어 그들 스스로 지옥의 불속으로 뛰어들기를 원하옵나이다.

예루살렘을 돌위에 돌도 없이 무너뜨리신 하나님, 이 악한 세상에 다시 주의 심판이 임하기를 원하옵나이다. 더이상 약자의 편에 서지 않고 주의 이름을 망령되게 외치며 무고한 자의 죽음 앞에 침묵하는 이 세계 모든 자들이 주의 심판대에 서게 하시옵소서. 그리고 오로지 주님 만이 온전히 영광받는 새 세상이 오기를 주여 기도합니다.

분열과 울분과 탄식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용기와 믿음과 지혜를 허락하시고 용서와 평화와 사랑이 주안에서 영원하기를 원하옵나이다.

우리의 기도가 부디 주의 전에 닿기를 간구하오며 우리의 영원한 중보자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죄를 사하는 제사장 그리스도

제 21 조: 그리스도의 속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약을 통하여 된 멜기세덱의 반열을 따라서
영원하신 대제사장임을 믿는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을 성부께 드리시고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와 같이,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하여
그의 귀하신 피를 흘리심으로
성부의 분노를 충분히 만족시키셨음을 믿는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 함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에게 징계가 내려졌다.
그는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았으며
“악인”들과 함께 계수되었으며46
본디오 빌라도가 그는 죄가 없다고 공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죄인으로 정죄를 받았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빼앗지 아니한 것을 물어주었으며47
그의 몸과 영혼 모두를 통하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48
고난을 당하셨다.
그가 우리의 죄 때문에
무서운 처벌을 감당하실 때에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으며49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다.50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이 모든 고난을 당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고51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임을 안다.52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으로부터 모든 위로를 얻으며,
그리스도께서 이미 치루셔서
성도들을 영원히 완전하게 만든
이 유일한 희생 이외에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화해할
다른 어떠한 방편을 찾거나 만들 필요가 없다.
이러한 이유를 따라서
하나님의 천사는 그를 예수, 즉 구세주라 불렀는데,
그것은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의미이다.53
46 이사야 53:4-12
47 시편 69:4
48 베드로전서 3:18
49 누가복음 22:44
50 마태복음 27:46
51 고린도전서 2:2
52 빌립보서 3:8
53 마태복음 1:21BACK TO TOP

히브리서 읽기

히브리서 10장 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 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히브리서는 한자리에 앉아서 통독하면 더 좋은 책이다. 13장을 통독하는데 한시간 정도 걸린다. 다른 책과는 달리 호흡이 길다. 1장과 2장에서 진리를 이야기하고 3장에서 비로소 적용이 나온다. 그다음에 한 두장 길게 서술한 뒤에야 적용이 되므로, 호흡이 길며, 인내심을 갖고, 끊지 않은 채 읽어야 논지를 따라갈 수 있다.

장별로 내용을 요약하면 대략 이렇다.

1장 천사보다 크신 이
2장 낮아져 시험받은 제사장, 속량
3장 적용- 죄를 이기고 끝까지 붙잡으라
4장 적용- 은혜 앞으로 나가자
5장 레위인 아닌 멜기세덱 파 대제사장
6장 적용- 단단한 것 먹도록 성숙하라


7장 영원전부터 계신 제사장,
더 좋은 새언약
8장 율법은 하늘언약의 모형
9장 자기 피로 영원히, 단번에, 속죄하심
10장 단번에 드리신 새언약
적용- 휘장 가운데 들어갈 담력을 얻었으니 신앙생활에 힘내자

11장 믿음의 선배들

12장 적용- 힘껏 달리며 예수를 바라보자. 징계 받아도 낙심하지 말자.

13장 삶과 찬송으로 제사 드리자

    제사장 예수님이 하신 일

    특히 예수님에 대해 히브리서 10:12에서 강조하는 것은 세 가지다. 히브리서의 중심 내용이라 할 수 있다.

    한, 영원한, 제사 / all time a single sacrifice for sins
    예수님께서 드리신 제사는 영원히 효력을 미치므로 한번만 드리면 충분하다.

    우리의 제사장이신 주님은 자신의 몸을 제물로, 자신의 몸을 찢어 여신 성전에서, 자신 자신이 중보하는 제사장이 되어 우리 죄를 용서하는 제물로 드리셨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약의 여호수아, 호세아, 여수룬과 같은 이름인데, 구원자라는 말이다. 특히 우리는 예수님이 ,참제사장이 되어 율법의 제사의식의 내용과 목적을 다 충족시키는,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자임을 알게 된다.

    나를 위해 행하신 화목 제사

    이천년 전 속죄는 과거의 일이 아니고, 현재도 우리를 구원한다. 그의 십자가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옛날 일이란 이유로 오늘 또 다시 희생해달라고 하면 안된다. 그 사건을 믿고 우리의 구원의 길로 삼아 제자의 삶을 감사함으로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주님의 십자가의 구원을 통해, 믿음의 선배들을 본 받아, 한 걸음 내딛을 힘을 얻는다.

    (히 12:1-3)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십자가 공의와 사랑 20조

    제 20 조: 그리스도의 안에 보이신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하심
    완전히 자비로우시고 동시에 매우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시어
    불순종할 수 있는 인간의 본성을 취하게 하시고,
    그의 가장 무서운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그의 인간 본성으로 죄의 처벌을 감당하게 하셨다.
    그의 아들로 우리의 죄를 감당하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에게 자신의 공의를 나타내셨다.
    그리고 정작 죄인되어서 멸망을 받아 마땅한 우리에게는
    가장 완전한 사랑을 가지사
    자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주시어 죽게 하시고,
    우리가 죽지아니하고 영생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칭의를 허락하기 위하여
    그 아들을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리심으로
    자신의 선하심과 자비를 부어주셨다.

    십자가형의 고정 고증 고통에 대해 생각해보자.

    고증


    평화롭게 달린 예수님의 십자가는 오해다.
    십자가는 로마 흉악한 죄수에게 가하는 강력한 처형 방법이다.
    유명한 검투사 노예들의 반란을 이끌던 스파르타쿠스와 반란 노예 5천여명이 십자가형을 받았다. 아피아 도로끝 까지 10미터 간격으로 매달았다. 처형이면서도 위협 및 전시효과가 컸다. 조선에서 효수형이 있다. 머리를 잘라 성문에 매다는 것과 같다.
    로마시대 무덤에서 십자가 처형 때 박았다가 뽑히지 않아서 뼈에 못이 박힌 채로 매장한 유골이 발굴된다. 십자가형의 흔적이다.
    십자가 형틀의 종류도 T, +,x 모양으로 다양했다.
    물론 넓은 제국이므로 처형자 맘대로 십자가 형의 종류와 방법과 절차는 달랐다. 처형집행자의 습관과 관행에 따라 방법이 달라진다.

    고정

    그러나 고정하는 방법을 생각해보면 어떤 식으로 예수님이 달리셨는지 상상할 수 있다.
    하체와 상체만 다루자.
    발가락 사이에 두 발을 겹쳐서 고상하게 박은 것이 아니다. 두 발이 허공에 떠있어서는 몸의 체중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상상은 발 받침대가 있었다고도 한다.

    못하나로 발을 박을 경우 고정이 문제다. 고통에 몸부림쳐서 발가락이 찢어지고 못에서 빠져나오면 낭패다. 발이 빠지면 몸무게로 팔도 빠져서 몸이 땅으로 떨어진다. 십자가형을 받은 죄수는 반드시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 이것이 형집행자의 의무다. 피범벅이되어 떨어진 죄수를 다시 매달려면 몹시 힘들고 귀찮다. 대신 발뒤꿈치 복숭아 뼈 바로 밑에 못을 박으면 튼튼하게 고정된다. 발뒤꿈치에 못이 박힌 유골이 여럿 발굴되는 것도 여러 방식중에 이런 방식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문제는 예수님의 뼈가 부러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출애굽기 유월절 어린양을 먹으며 뼈를 부러뜨리지 않는 이유가 나중에 예수님의 처형에서 뼈가 상하지 않는 것으로 연관지어 이해했다.
    즉 발뒤꿈치에 못을 박으면 뼈가 상한다. 그러므로 발가락 사이에 못을 박고 대신, 발 아래 발받침대를 대는 방식을 사용했을 것이라고 보아도 좋겠다.

    상체는 양손에 못 두개를 박은 것으로 상상한다. 그런데 고정이 쉽지 않다. 손바닥에 박으면 몸무게로 인해 손바닥이 찢어지고 몸이 아래로 떨어질 것이다. 그래서 팔을 줄로 묶는 방법을 생각한다. 줄로 단단히 묶으면 못은 거들뿐이다.
    손에 못이 박힌 구멍이 있으므로, 못을 박기는 했을 것이다만, 밧줄로 팔을 묶었을까? 처형인에게 가장 쉽고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못 두개로 확실하게 고정하는 방법이 있긴하다.
    그것은 팔목뼈 두개가 모이는 지점을 밖는 것이다. 그러면 뼈도 부러지지 않고, 손바닥이 아니라, 손목에 밖는 것으로 상체가 단단히 고정된다.

    고통

    손목은 신경다발이 지나가는 곳으로 다치면 매우 아프다. 팔뒤꿈치를 부딪치면 고통스러운데 그것과 같다. 단지 그 신경다발을 집게로 집어서 짖이긴 다음에 집게를 비트는 정도의 심한 고통이 더 할 뿐이다.
    처형자에게는 쉽고 간편하며, 죄수에게는 고통을 안겨주므로 처형의도에 부합한다.

    십자가에 매달아 두면 결국 죄수는 죽는다. 진이 빠지고 피를 흘려 죽는 것이 아니라, 질식사다. 매달린 죄수는 고통속에서도 숨쉬기 위해 발에 힘주고 상체를 들어올려 숨을 들이 마신다. 몸이 쳐지며 숨을 내쉰 다음에 다시 발에 힘주고 숨을 들이 마셔야 한다. 이 과정이 고통스럽다. 결국 조금씩 숨이 모자라며 힘이 빠진다. 그러다 들어 올릴 힘이 없으면 질식해 죽는다.
    평소 단련된 건장한 산적두목은 십자가에 달려서도 오래 버틸수 있다. 며칠이고 매달리며 사는 게 고통스럽다. 처형자에게도 이는 골치거리다. 정한 날까지 죽어야 시체를 내리고 퇴근할 게 아닌가.
    그래서 빨리 죽게 하려고, 종아리 뼈를 부러뜨린다. 그러면 몸을 들어올리지 못하고, 숨이 막혀 죽게 된다. 모질게 고통스런 호흡을 계속하던 죄수도 원하던 자비로운 행동이다.

    예수님은 유월절 명절이 시작되는 금요일에 처형되었으므로, 그날 오후까지는 사망해야 했다. 처형집행자는 오후까지 죽지 않을 겨우, 다리를 뿌러뜨리고, 숨이 막혀 죽게 한 뒤에, 시신을 인도하여야 퇴근하여 명절 식사에 참석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예수님은 3시에 이미 숨을 거두셨다. 그래서 다리뼈가 상하지 않고 시체를 모셔다가 매장할 수 있었다.

    십자가의 이유


    문제는 이런 고통스런 십자가를 주님이 지신 이유다.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면서, 우리를 살리려면, 자격 있는 누군가 대신 우리의 죄를 져야 한다.
    우리의 죄 만큼의 벌을 받아야 하는데, 우리 죄의 값은 사망이다.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주님이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셨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이 크면 큰 만큼 우리가 받았어야 하는 벌이 얼마나 큰지 보여준다.

    동시에 십자가는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이다. 그 고통이 크면 클 수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 보여준다. 죄 없는 하나님이 이런 고통을 직접 대신 받으시면서까지 우리를 살리셨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보여주는 길이었다.

    요한복음 3: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 멸망과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아들을 세상에 내어주셨다.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기억하자. 그가 우리를 살리셨다.

    제 19 조 그리스도의 두 본성

    제 19 조 그리스도의 한 위격 안에 있는 두 본성 The Two Natures in the One Person of Christ


    우리는 이 잉태conception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의 위격the person of the Son of God이 인성the human nature과 분리되지 않고inseparably 연합되어united 있으며 연결되어서joined,1 하나님의 두 아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두 위격이 있는 것도 아니며, 오직 두 본성이 하나의 위격one single person 안에 연합되어 있음을 믿습니다. 각각의 본성은 그 자체의 구별된 속성distinct properties을 갖고 있습니다. 즉 그분의 신성divine nature은 항상 창조되지 아니하며,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이(히 7:3), 하늘과 땅에 충만하십니다.2 그분의 인성human nature은 그 자체의 속성을 상실하지 않으시는데, 시작된 날이 있고 창조되었으며 유한하시고 참된 육체의 모든 속성들을 다 갖고 계십니다.3 비록 그의 부활로 인하여 당신의 인성에 불멸성immortality을 부여 받으셨을지라도, 그분은 인성의 실체reality를 바꾸지 않으셨습니다.4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과 부활이 또한 그분의 몸의 실체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5

    그러나 이 두 본성은 하나의 위격에 밀접하게 연합되어 있어서 두 본성은 그의 죽음에 의해서도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죽으실 때 당신의 아버지의 손에 의탁하신 것은 그분의 육체로부터 떠난departed 참된 사람의 영a real human spirit이었습니다.6 한편 그분의 신성은 항상 그분의 인성과 연합되어 있었으며, 심지어 무덤에 계시는 동안에도 그분의 신성은 인성과 연합되어 있었습니다.7 그리고 비록 신성 그 자체가 잠시 동안 드러나지manifest 않았을 뿐, 그분이 어린 아이일 때에도 그분 안에 신성이 있었던 것처럼 신성은 그분 안에 언제나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위와 같은 이유에서 우리는 그가 참된 하나님true God이시며 동시에 참된 사람true man이심을 고백합니다. 곧 참된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당신의 능력으로 사망을 정복하셨으며, 참된 사람으로서 그분은 당신의 육체의 연약함infirmity에 따라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1 요 1:14; 10:30; 롬 9:5; 빌 2:6-7
    2 마 28:20
    3 딤전 2:5
    4 마 26:11; 눅 24:39; 요 20:25; 행 1:3,11; 3:21; 히 2:9
    5 고전 15:21; 빌 3:21
    6 마 27:50
    7 롬 1:4

    기독교의 신비 중의 신비는 삼위이지만 일체인 삼위일체 신비다. 또한 예수님이 신이시며 인간이라는 신비가 있다. 두 본성이지만 한 분이시다. 신 반 사람 반이 아니고, 완전한 신이신데, 완전한 인간이 되셨다.

    심지어 유년때에도 신성이 숨어 있었다. 다만 때가 이르기까지 신성을 감추셨다. 완전한 구속사역을 이루시기 위한 예수님의 겸손이자 자발적 순종이셨다. 신성을 감춘 인간으로서 굶주리고, 아프고, 애통하고, 슬프고, 화내고, 우셨다.

    한 예수 안에 신성과 인성이 있듯이 신자 안에도 ‘그리스도’인의 거룩함과 그리스도’인’의 연약함이 공존한다. 영광스러운 신분인 신자인데 우리는 때로 얼마나 무기력하고 죄에 연약한가. 죄는 없으셨던 주님께 호소할 따름이다. 주가 도우실 것이다. 능히 도우실 것이다.

    제 18 조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

    제 18 조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
    The Incarnation of the Son of God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하신 그 약속을 성취fulfill하시기 위하여,1 당신께서 정하신 때에,2 당신의 독생하시고 영원한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으니, 그 아들은 종의 형체the form of a servant를 취하사 사람과 같은 모양the likeness of men으로 태어나셨음을 고백합니다(빌 2:7). 그 분은 진실로 모든 연약함all its infirmities을 가진 참된 사람의 본성real human nature을 취하셨으되,3 죄는 없으십니다.4 왜냐하면 그분은 사람의 행위the act of a man에 의한 것이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복된 동정녀 마리아의 모태에서 잉태되셨기 때문입니다.5 그분은 인성을 입으심에 있어서 육체body에 대해서만 아니라 참된 사람의 영혼true human soul에 대해서도 인성을 취하심으로써, 참된 사람real man이 되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육체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영혼도 잃었기 때문에 둘 다 구원하시기 위해서 둘 다를 취하셔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어머니로부터 사람의 육체를 취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재세례파 이단에 반대하여,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녀들의 혈육flesh and blood에 함께 속하셨음을 고백합니다(히 2:14).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허리에서 나신 자요a fruit of the loins of David(행 2:30), 육신flesh으로는 다윗의 자손으로 나신 자며born of the seed of David(롬 1:3), 동정녀 마리아의 태의 열매요(눅 1:42), 여인에게서 나셨고(갈 4:4), 다윗의 가지시며(렘 33:15), 이새의 줄기에서 나신 싹이시요(사 11:1), 유다로 좇아 나셨고(히 7:14), 육신으로는 유대인의 자손이시며(롬 9:5), 성자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들과 연관되시므로 아브라함의 씨입니다.6 그러므로 그는 모든 면에 있어서 형제들과 같이 되셨으나 죄는 없으십니다(히 2:16-17; 4:15).

    이와 같이 그분은 진실로 우리의 임마누엘Immanuel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God with us이십니다(마 1:23).

    1 창 26:4; 삼하 7:12-16; 시 132:11; 눅 1:55; 행 13:23
    2 갈 4:4
    3 딤전 2:5; 3:16; 히 2:14
    4 고후 5:21; 히 7:26; 벧전 2:22
    5 마 1:18; 눅 1:35
    6 갈 3:16

    예수님의 성육신은 기독교의 중심이다. 그러나 기독교만 성육신을 말하지 않는다. 특히 힌두교에선 성육신이 흔하다. 신이 뱀, 코끼리 등 여러 모습으로 윤회 환생하며 인간의 모습을 입고 성육신한다. 부처인 싯다르타도 힌두교 신이 성육신한 것에 불과하다고 여기므로, 힌두교에서는 불교는 부분만 믿는 이단인 셈이다.

    다른 점이라면, 우리가 믿는 성육신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종 수준까지 낮아져서 종의 형체를 취하셨다는 말이다.

    참으로 하나님이 낮아지셔서 우리를 구하기 위해 낮고 천한 곳까지 내려오셨다.

    재세례파가 잘 못한 점은 신약만 중심으로 본다든가, 당시 반사회적 테러집단이었다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육체를 부인하는 영지주의적 관점을 들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이 아니고, 영은 그대로 있고 인간인 척만 하셨다는 말이 된다. 고통도 받지 않고 죽지도 않으셨으니, 대속하실 수 없다.

    그러나 주님은 완전한 사람의 몸과 영을 입어, 참으로 우리 편이 되셨다. 참으로 성육신하셔셔 우리처럼 사셨다. 죄는 없으셨다. 우리와 같은 길을 가셨던 주님의 모범을 찬양하자.

    제 17 조 타락한 사람의 회복

    제 17 조 타락한 사람의 회복 The Rescue of Fallen Man
    우리는 사람이 스스로 육체적이고 영적인 죽음에 빠져 완전히 비참하게miserable 되었을 때, 은혜로우신 우리 하나님께서 당신의 놀라운 지혜와 선하심으로 사람이 당신 앞에서 두려워 떨며 도망칠 때에 그를 찾으신다는 것을 믿습니다.1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주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갈 4:4),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bruise(창 3:15)에 대한 약속으로 사람을 위로하시고, 복을 주셨습니다.2

    1 창 3:9
    2 창 22:18; 사 7:14; 요 1:14; 5:46; 7:42; 행 13:32-33; 롬 1:2-3; 갈 3:16

    1. 영생이 무엇인가? 영원히 사는 것이다.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죽음에 육체적인 죽음과 영적인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몸이 영원히 사는 육체적 의미의 영생과 함께 영적인 영생을 생각할 수 있다.

    2. 원래 하나님과 함께 살던 사람은 주님과 친밀히 사귀며 행복하였다. 불순종하여 낙원에서 추방된 인간은 하나님과 단절되었다. 이를 영적인 죽음이라고 한다. 쫓겨난 에덴 동산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 영원한 단절이다.

    3.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살 길을 열어 주셨다.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믿고 영혼이 살면 하나님과 다시 하나가 된다. 한번 자녀가 되면 아무도 하나님의 손에서 우리를 빼앗을 수 없다. 그러니 영원히 하나가되고 영원히 영적으로 살게 된다. 이를 영생이라 한다.

    4. 육체적인 영생은 죽고 나서 다시 몸이 부활한 뒤에 얻는다. 영적인 영생은 예수를 만난 순간부터 하나님과 다시 연결되어 영원히 살게 되며 얻는다. 지금 이 땅에서 이 순간 영적인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된다.

    5. 죄 많은 세상속에서도, 죄에서 구원받은 신자는 오늘도 영생을 살아간다. 하나님과 연결되어, 이 확실한 생명을 간간이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이 영광이 사라진 죽음앞에 두렵던 인간에게 하늘 영광을 누리고 영생을 맛보는 은혜가 임했다. 영원한 삶을 살며 영생을 얻는 사람답게 살아가자.

    제 16 조 하나님의 선택 Divine Election

    제 16 조 하나님의 선택 Divine Election
    우리는 아담의 모든 후손들이 첫 사람의 범죄transgression로 말미암아 멸망perdition과 파멸ruin에 빠졌을 때plunged,1 하나님께서는 친히 자기 자신을 자비롭고merciful 공의로우신just 분으로 나타내셨음을 믿습니다. 자비로우심merciful이란 하나님께서 영원하시고 변치 않으시는 경륜counsel 가운데2 당신의 순수한 선하심pure goodness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서3 선택하신4 자들을, 그들의 행위works를 고려하지 않으시고5 멸망perdition으로부터 구출하시고rescuing 구원하심saving에 있습니다. 공의로우심just이란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을 그 스스로 빠져든plunged 타락fall과 멸망perdition에 버려두심leaving에 있습니다.6

    1 롬 3:12
    2 요 6:37, 44; 10:29; 17:2,9,12; 18:9
    3 요 15:16, 19; 롬 8:29; 엡 1:4-5
    4 삼상 12:22; 시 65:4; 행 13:48; 롬 9:16; 11:5; 딛 1:1
    5 말 1:2-3; 롬 9:11-13; 딤후 1:9; 딛 3:4-5
    6 롬 9:19-22; 벧전 2:8

    1. 자기 스스로 잘났다고 말하는 사람은 재수없다. 가장 재수없는 사람은 자기만 잘났다고 하는 사람이다. 기독교는 구원의 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하니 가장 재수없게 비쳐지는 것이다.

    2. 같은 원리로 하나님의 선택은 오해받는다. 세상사람들 눈에 교회 성도들은 얄밉다. 저들은 자기네만 예수믿고 구원받아 천국간다고 한다. 게다가 자기들만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자기들만 천국에 간다고 한다. 미움받는 게 당연하다.

    3. 선택의 교리는 신자들로부터도 오해받는다. 나를 구원하신 분에게, 왜 더 일찍 구하지 않았나 불평한다. 왜 우리 가족들은 구원하지 않는지 묻는다. 기독교 교리에 따라 이순신 장군조차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해서 지옥가는 것은 안된다고 논쟁하려 한다. 그러나 이는 에 빠진 사람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 놓으라는 억지다. 구원햇더니, 왜 나만 선택했냐고 한다.

    4. 철학적 상상은 한가한 소리가 된다. 전에 내가 물에 빠져 죽을 뻔한 때를 생각해보면, 죽기 직전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이대로 죽는구나 하고 죽어갔다. 아무 힘도 없이 저항도 못하고 빠져 죽는데, 멀리서 나를 발견한 어른들이 와서 건져주었다. 고맙다는 말도 못하고 그저 살아나 모래해변을 밟은 것이 기뻤고, 들이킨 짠 물을 뱉느라 정신도 없었다. 물에 빠져 죽은 사람도 많은데 왜 나는 구조되었을까? 이유도 모르겠고,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5. 하나님이 그 신비로운 사랑으로 죄인인 우리를 구하셨다. 또한 공의로써 사람들을 어둠속에 버려두어 죄 값을 받게 한다. 사랑으로 선택하시고, 공의로 버리신다. 토기장이는 자기 그릇을 만들고 깨고, 선택하고 버릴 권리가 있다. 왕이신 하나님에게도 버릴 권리가 있다. 선택과 유기는 모두 왕이신 하나님의 재량이다.

    6. 얄미운 종교가 된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의 교리를 믿는 것도, 유기된 사람들을 보면서 의심하는 것도 우리의 선택이 아니다. 신중의 신인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그의 왕되심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하나님은 이 얄미운 교리를 통해서 우리를 구하셨다. 우리는 겨우 구원받을 수 있었기에 감사할 뿐이다. 왕이신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 그저 감사할 뿐이다.

    동물시리즈 3 – 낙타, 성결한 삶

    (막 1:6)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Mk 1:6) Now John was clothed with camel’s hair and wore a leather belt around his waist and ate locusts and wild honey.

    (마 19: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Mt 19:24) Again I tell you, it is easier for a camel to go through the eye of a needle than for a rich person to enter the kingdom of God.”

    사실은 알파카를 하려고 했지만, 알파카는 남미의 동물이라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 같은 과인 낙타를 골랐다. 알파카도 윗 입술이 갈라져서 풀을 씹을 때 낙타처럼 이빨이 보이고, 성이 나면 낙타처럼 침을 뱉는다.

    낙타는 고대의 큰 재산이었다. 양이나 염소보다 큰 가축이므로 짐도 많이 나를 수 있는 상업적 물류유통 수단을 가진 것이다. 포드 150 트럭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즉시 상업 활동에 이용할 수 있다. 또한 무기가 된다. 말대신 낙타를 타고 돌격하며 칼을 휘두르는 병사는 기병대처럼 강력한 군대다.

    그러나 신약에서 낙타는 검약과 절제의 상징으로 드러난다.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칠 때, 낙타 털가죽 옷을 입었다. 거칠고 뻣뻣한 낙타털 가죽은 불편하고 볼품없고, 싸다. 검소한 선지자의 외모는 낙타털 가죽옷으로 대표된다.

    또 예수님이 재물을 사랑하는 탐심을 경계하면서,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다.

    결국 이를 연결하면 구약 때 큰 재산 이었던 낙타는 신약에서 검약과 절제의 상징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구원받은 기독교인은 세례 요한의 질박하고 검소한 옷차림을 본받아야 한다.

    가난하고 구질구질 하게 살 필요는 없다. 탐심을 갖지 말라는 말은 돈을 전혀 벌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돈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이 세상의 풍조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새로운 법을 따라야 한다.

    세상이 다 바라는 성공, 부요함, 경제적 자유, 부의 증식, 절세, 나의 왕국을 세우는 것, 그러다 보면 남의 것을 부러워 하고 탐내며 질투하게 되는 탐심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도 낙타 옷을 입자. 어려워도 세상과 다른 길을 간 믿음의 선배들을 따라가자.

    동물시리즈 2 – 염소, 죄의 문제

    (사 11:6-9) 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사 11:6-9) 6 The wolf shall dwell with the lamb, and the leopard shall lie down with the young goat, and the calf and the lion and the fattened calf together; and a little child shall lead them. 7 The cow and the bear shall graze; their young shall lie down together; and the lion shall eat straw like the ox. 8 The nursing child shall play over the hole of the cobra, and the weaned child shall put his hand on the adder’s den. 9 They shall not hurt or destroy in all my holy mountain; for the earth shall be full of the knowledge of the LORD as the waters cover the sea.

    염소는 이스라엘 중동지방에서 가장 흔한 동물이다. 양과 함께 염소는 흔한 가축이며, 우리가 치킨 먹듯이 염소, 양고기가 중동사람들의 주식이다.

    구약시대에는 사람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동물을 잡아서 희생시키고 제사로 드렸다. 죄없는 동물이 대신 죽은 것으로 나의 죄를 용서받은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감사제나 정기적인 제사때는 수컷을 잡는다. 대장 수컷은 무리 중에 한 마리만 있어도 씨를 퍼뜨리는데 문제가 없다. 그 외의 수컷은 2인자가 되어, 무리에서 중간 역할을 맡지만, 암컷들에 접근하려다가는 대장 수컷에게 혼난다. 게다가 수컷은 한살이 넘으면 사춘기 호르몬 냄새가 심해서 요리하기도 고약하다. 그래서 차라리 쓸모없는 수컷은 1년이 되기 전에, 잡아 먹는 것이 가장 좋다.

    따라서 수컷은 10만원, 암컷은 20만원으로 암컷이 더 비싸다. 그래서인지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과 화해하려는 속죄제 제물은 암컷을 죽여 제사로 드린다.

    염소와 관련하여 특이한 제도가 아사셀 염소다. 한 염소를 택하여 머리에 안수하면서 죄를 전가하여 죄를 떠 넘기고, 이 염소를 광야로 보내어 멀리 떠나 보낸다. 상징적으로 죄가 멀리 떠나는 상징으로 우리가 거룩해지고 죄를 멀리하는 것을 보여주는 행위다.

    레위기 16장 21절 아론은 그의 두 손으로 살아 있는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아뢰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대신 드리는 희생 제물이 되었고, 우리 죄가 용서 받는다.

    죄 문제가 해결되면, 비로소 우리가 사는 세상, 죽어서 가는 곳, 하나님이 다스리는 죄가 없고 문제가 없는 완벽한 곳이 바로 천국이 된다. 결국 죄가 없어진 곳이 천국인데, 그 천국에는 갓난 아기 염소와 표범이 함께 누워도 안전하다. 이리와 양, 표범과 염소, 송아지와 젊은 사자, 암소와 곰, 아기와 독사가 평화롭게 공존한다. 해함도 다치는 일도 없다.

    전쟁과 미움과 분열과 다툼이 없는 그 천국에 살려면, 그 천국을 만들어 가려면, 우리 안의 죄, 이 세상의 죄를 해결해야 한다. 죄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바이러스가 퍼진 세상처럼 온 세상이 지옥으로 변한다.

    죄가 중요하므로, 하나님은 구약 때부터, 제사제도를 통해 우리가 죄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인생의 문제임을 알려주셨다.

    당신은 이 죄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가?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가? 우리 대신 죽은 어린 양, 예수님을 통해서 기독교인은 죄를 해결하고 구원받는다. 당신도 죄를 해결하고 천국을 맛보기 바란다.

    동물시리즈 1 – 닭, 신과의 만남

    (시 91:1-4) 1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2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3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4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

    닭이 성경에 많이 나온다. 구약시대 제물로 양과 염소가 일반적이지만, 가난한 사람은 비둘기 등 조류로 드렸다. 느헤미야의 식사기록에도 닭 요리가 있다. 그 때부터 양념치킨이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가장 유명한 닭 이야기는 베드로가 닭이 세번 울기 전에 세번 예수를 부인하는 사건일 것이다. 닭을 키워 본 사람 만이 알 수 있는 것은 수탉은 새벽에만 울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운다는 것이다. 실로 이스라엘과 요르단에서 닭을 키우는 것을 보았다. 성경의 땅에 베드로 닭의 후손들이 뛰어 놀고 있었다.

    닭은 아니지만, 닭을 포함하는 조류들은 성경에 더 자주 나온다.

    시편에서 사냥군의 올무를 언급한다. 새를 잡기 위해 쳐 놓은 그물에 잡힌 새를 표현하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를 붙잡고 얽어매는 죄와 어려움을 상징한다. 베드로의 부인하는 실수도 결국 죄의 문제다. 하나님을 잘 믿고 싶어도 우리는 닭처럼 멍청하고 약하고 답이 없다.

    그럼에도 이런 연약한 우리를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서 품어주신다. 암탉이 그 새끼를 품에 품듯이, 그 날개 깃으로 덮어 보호하신다.

    당신은 이런 신이 있는가? 피할 날개 그늘을 찾았는가? 우리를 암탉처럼 보호하고 품어줄 그 신을 만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