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 조 그리스도의 두 본성

제 19 조 그리스도의 한 위격 안에 있는 두 본성 The Two Natures in the One Person of Christ


우리는 이 잉태conception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의 위격the person of the Son of God이 인성the human nature과 분리되지 않고inseparably 연합되어united 있으며 연결되어서joined,1 하나님의 두 아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두 위격이 있는 것도 아니며, 오직 두 본성이 하나의 위격one single person 안에 연합되어 있음을 믿습니다. 각각의 본성은 그 자체의 구별된 속성distinct properties을 갖고 있습니다. 즉 그분의 신성divine nature은 항상 창조되지 아니하며,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이(히 7:3), 하늘과 땅에 충만하십니다.2 그분의 인성human nature은 그 자체의 속성을 상실하지 않으시는데, 시작된 날이 있고 창조되었으며 유한하시고 참된 육체의 모든 속성들을 다 갖고 계십니다.3 비록 그의 부활로 인하여 당신의 인성에 불멸성immortality을 부여 받으셨을지라도, 그분은 인성의 실체reality를 바꾸지 않으셨습니다.4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과 부활이 또한 그분의 몸의 실체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5

그러나 이 두 본성은 하나의 위격에 밀접하게 연합되어 있어서 두 본성은 그의 죽음에 의해서도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죽으실 때 당신의 아버지의 손에 의탁하신 것은 그분의 육체로부터 떠난departed 참된 사람의 영a real human spirit이었습니다.6 한편 그분의 신성은 항상 그분의 인성과 연합되어 있었으며, 심지어 무덤에 계시는 동안에도 그분의 신성은 인성과 연합되어 있었습니다.7 그리고 비록 신성 그 자체가 잠시 동안 드러나지manifest 않았을 뿐, 그분이 어린 아이일 때에도 그분 안에 신성이 있었던 것처럼 신성은 그분 안에 언제나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위와 같은 이유에서 우리는 그가 참된 하나님true God이시며 동시에 참된 사람true man이심을 고백합니다. 곧 참된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당신의 능력으로 사망을 정복하셨으며, 참된 사람으로서 그분은 당신의 육체의 연약함infirmity에 따라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1 요 1:14; 10:30; 롬 9:5; 빌 2:6-7
2 마 28:20
3 딤전 2:5
4 마 26:11; 눅 24:39; 요 20:25; 행 1:3,11; 3:21; 히 2:9
5 고전 15:21; 빌 3:21
6 마 27:50
7 롬 1:4

기독교의 신비 중의 신비는 삼위이지만 일체인 삼위일체 신비다. 또한 예수님이 신이시며 인간이라는 신비가 있다. 두 본성이지만 한 분이시다. 신 반 사람 반이 아니고, 완전한 신이신데, 완전한 인간이 되셨다.

심지어 유년때에도 신성이 숨어 있었다. 다만 때가 이르기까지 신성을 감추셨다. 완전한 구속사역을 이루시기 위한 예수님의 겸손이자 자발적 순종이셨다. 신성을 감춘 인간으로서 굶주리고, 아프고, 애통하고, 슬프고, 화내고, 우셨다.

한 예수 안에 신성과 인성이 있듯이 신자 안에도 ‘그리스도’인의 거룩함과 그리스도’인’의 연약함이 공존한다. 영광스러운 신분인 신자인데 우리는 때로 얼마나 무기력하고 죄에 연약한가. 죄는 없으셨던 주님께 호소할 따름이다. 주가 도우실 것이다. 능히 도우실 것이다.

제 18 조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

제 18 조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
The Incarnation of the Son of God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하신 그 약속을 성취fulfill하시기 위하여,1 당신께서 정하신 때에,2 당신의 독생하시고 영원한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으니, 그 아들은 종의 형체the form of a servant를 취하사 사람과 같은 모양the likeness of men으로 태어나셨음을 고백합니다(빌 2:7). 그 분은 진실로 모든 연약함all its infirmities을 가진 참된 사람의 본성real human nature을 취하셨으되,3 죄는 없으십니다.4 왜냐하면 그분은 사람의 행위the act of a man에 의한 것이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복된 동정녀 마리아의 모태에서 잉태되셨기 때문입니다.5 그분은 인성을 입으심에 있어서 육체body에 대해서만 아니라 참된 사람의 영혼true human soul에 대해서도 인성을 취하심으로써, 참된 사람real man이 되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육체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영혼도 잃었기 때문에 둘 다 구원하시기 위해서 둘 다를 취하셔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어머니로부터 사람의 육체를 취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재세례파 이단에 반대하여,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녀들의 혈육flesh and blood에 함께 속하셨음을 고백합니다(히 2:14).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허리에서 나신 자요a fruit of the loins of David(행 2:30), 육신flesh으로는 다윗의 자손으로 나신 자며born of the seed of David(롬 1:3), 동정녀 마리아의 태의 열매요(눅 1:42), 여인에게서 나셨고(갈 4:4), 다윗의 가지시며(렘 33:15), 이새의 줄기에서 나신 싹이시요(사 11:1), 유다로 좇아 나셨고(히 7:14), 육신으로는 유대인의 자손이시며(롬 9:5), 성자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들과 연관되시므로 아브라함의 씨입니다.6 그러므로 그는 모든 면에 있어서 형제들과 같이 되셨으나 죄는 없으십니다(히 2:16-17; 4:15).

이와 같이 그분은 진실로 우리의 임마누엘Immanuel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God with us이십니다(마 1:23).

1 창 26:4; 삼하 7:12-16; 시 132:11; 눅 1:55; 행 13:23
2 갈 4:4
3 딤전 2:5; 3:16; 히 2:14
4 고후 5:21; 히 7:26; 벧전 2:22
5 마 1:18; 눅 1:35
6 갈 3:16

예수님의 성육신은 기독교의 중심이다. 그러나 기독교만 성육신을 말하지 않는다. 특히 힌두교에선 성육신이 흔하다. 신이 뱀, 코끼리 등 여러 모습으로 윤회 환생하며 인간의 모습을 입고 성육신한다. 부처인 싯다르타도 힌두교 신이 성육신한 것에 불과하다고 여기므로, 힌두교에서는 불교는 부분만 믿는 이단인 셈이다.

다른 점이라면, 우리가 믿는 성육신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종 수준까지 낮아져서 종의 형체를 취하셨다는 말이다.

참으로 하나님이 낮아지셔서 우리를 구하기 위해 낮고 천한 곳까지 내려오셨다.

재세례파가 잘 못한 점은 신약만 중심으로 본다든가, 당시 반사회적 테러집단이었다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육체를 부인하는 영지주의적 관점을 들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이 아니고, 영은 그대로 있고 인간인 척만 하셨다는 말이 된다. 고통도 받지 않고 죽지도 않으셨으니, 대속하실 수 없다.

그러나 주님은 완전한 사람의 몸과 영을 입어, 참으로 우리 편이 되셨다. 참으로 성육신하셔셔 우리처럼 사셨다. 죄는 없으셨다. 우리와 같은 길을 가셨던 주님의 모범을 찬양하자.

제 17 조 타락한 사람의 회복

제 17 조 타락한 사람의 회복 The Rescue of Fallen Man
우리는 사람이 스스로 육체적이고 영적인 죽음에 빠져 완전히 비참하게miserable 되었을 때, 은혜로우신 우리 하나님께서 당신의 놀라운 지혜와 선하심으로 사람이 당신 앞에서 두려워 떨며 도망칠 때에 그를 찾으신다는 것을 믿습니다.1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주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갈 4:4),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bruise(창 3:15)에 대한 약속으로 사람을 위로하시고, 복을 주셨습니다.2

1 창 3:9
2 창 22:18; 사 7:14; 요 1:14; 5:46; 7:42; 행 13:32-33; 롬 1:2-3; 갈 3:16

1. 영생이 무엇인가? 영원히 사는 것이다.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죽음에 육체적인 죽음과 영적인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몸이 영원히 사는 육체적 의미의 영생과 함께 영적인 영생을 생각할 수 있다.

2. 원래 하나님과 함께 살던 사람은 주님과 친밀히 사귀며 행복하였다. 불순종하여 낙원에서 추방된 인간은 하나님과 단절되었다. 이를 영적인 죽음이라고 한다. 쫓겨난 에덴 동산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 영원한 단절이다.

3.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살 길을 열어 주셨다.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믿고 영혼이 살면 하나님과 다시 하나가 된다. 한번 자녀가 되면 아무도 하나님의 손에서 우리를 빼앗을 수 없다. 그러니 영원히 하나가되고 영원히 영적으로 살게 된다. 이를 영생이라 한다.

4. 육체적인 영생은 죽고 나서 다시 몸이 부활한 뒤에 얻는다. 영적인 영생은 예수를 만난 순간부터 하나님과 다시 연결되어 영원히 살게 되며 얻는다. 지금 이 땅에서 이 순간 영적인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된다.

5. 죄 많은 세상속에서도, 죄에서 구원받은 신자는 오늘도 영생을 살아간다. 하나님과 연결되어, 이 확실한 생명을 간간이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이 영광이 사라진 죽음앞에 두렵던 인간에게 하늘 영광을 누리고 영생을 맛보는 은혜가 임했다. 영원한 삶을 살며 영생을 얻는 사람답게 살아가자.

제 16 조 하나님의 선택 Divine Election

제 16 조 하나님의 선택 Divine Election
우리는 아담의 모든 후손들이 첫 사람의 범죄transgression로 말미암아 멸망perdition과 파멸ruin에 빠졌을 때plunged,1 하나님께서는 친히 자기 자신을 자비롭고merciful 공의로우신just 분으로 나타내셨음을 믿습니다. 자비로우심merciful이란 하나님께서 영원하시고 변치 않으시는 경륜counsel 가운데2 당신의 순수한 선하심pure goodness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서3 선택하신4 자들을, 그들의 행위works를 고려하지 않으시고5 멸망perdition으로부터 구출하시고rescuing 구원하심saving에 있습니다. 공의로우심just이란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을 그 스스로 빠져든plunged 타락fall과 멸망perdition에 버려두심leaving에 있습니다.6

1 롬 3:12
2 요 6:37, 44; 10:29; 17:2,9,12; 18:9
3 요 15:16, 19; 롬 8:29; 엡 1:4-5
4 삼상 12:22; 시 65:4; 행 13:48; 롬 9:16; 11:5; 딛 1:1
5 말 1:2-3; 롬 9:11-13; 딤후 1:9; 딛 3:4-5
6 롬 9:19-22; 벧전 2:8

1. 자기 스스로 잘났다고 말하는 사람은 재수없다. 가장 재수없는 사람은 자기만 잘났다고 하는 사람이다. 기독교는 구원의 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하니 가장 재수없게 비쳐지는 것이다.

2. 같은 원리로 하나님의 선택은 오해받는다. 세상사람들 눈에 교회 성도들은 얄밉다. 저들은 자기네만 예수믿고 구원받아 천국간다고 한다. 게다가 자기들만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자기들만 천국에 간다고 한다. 미움받는 게 당연하다.

3. 선택의 교리는 신자들로부터도 오해받는다. 나를 구원하신 분에게, 왜 더 일찍 구하지 않았나 불평한다. 왜 우리 가족들은 구원하지 않는지 묻는다. 기독교 교리에 따라 이순신 장군조차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해서 지옥가는 것은 안된다고 논쟁하려 한다. 그러나 이는 에 빠진 사람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 놓으라는 억지다. 구원햇더니, 왜 나만 선택했냐고 한다.

4. 철학적 상상은 한가한 소리가 된다. 전에 내가 물에 빠져 죽을 뻔한 때를 생각해보면, 죽기 직전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이대로 죽는구나 하고 죽어갔다. 아무 힘도 없이 저항도 못하고 빠져 죽는데, 멀리서 나를 발견한 어른들이 와서 건져주었다. 고맙다는 말도 못하고 그저 살아나 모래해변을 밟은 것이 기뻤고, 들이킨 짠 물을 뱉느라 정신도 없었다. 물에 빠져 죽은 사람도 많은데 왜 나는 구조되었을까? 이유도 모르겠고,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5. 하나님이 그 신비로운 사랑으로 죄인인 우리를 구하셨다. 또한 공의로써 사람들을 어둠속에 버려두어 죄 값을 받게 한다. 사랑으로 선택하시고, 공의로 버리신다. 토기장이는 자기 그릇을 만들고 깨고, 선택하고 버릴 권리가 있다. 왕이신 하나님에게도 버릴 권리가 있다. 선택과 유기는 모두 왕이신 하나님의 재량이다.

6. 얄미운 종교가 된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의 교리를 믿는 것도, 유기된 사람들을 보면서 의심하는 것도 우리의 선택이 아니다. 신중의 신인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그의 왕되심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하나님은 이 얄미운 교리를 통해서 우리를 구하셨다. 우리는 겨우 구원받을 수 있었기에 감사할 뿐이다. 왕이신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 그저 감사할 뿐이다.

동물시리즈 3 – 낙타, 성결한 삶

(막 1:6)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Mk 1:6) Now John was clothed with camel’s hair and wore a leather belt around his waist and ate locusts and wild honey.

(마 19: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Mt 19:24) Again I tell you, it is easier for a camel to go through the eye of a needle than for a rich person to enter the kingdom of God.”

사실은 알파카를 하려고 했지만, 알파카는 남미의 동물이라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 같은 과인 낙타를 골랐다. 알파카도 윗 입술이 갈라져서 풀을 씹을 때 낙타처럼 이빨이 보이고, 성이 나면 낙타처럼 침을 뱉는다.

낙타는 고대의 큰 재산이었다. 양이나 염소보다 큰 가축이므로 짐도 많이 나를 수 있는 상업적 물류유통 수단을 가진 것이다. 포드 150 트럭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즉시 상업 활동에 이용할 수 있다. 또한 무기가 된다. 말대신 낙타를 타고 돌격하며 칼을 휘두르는 병사는 기병대처럼 강력한 군대다.

그러나 신약에서 낙타는 검약과 절제의 상징으로 드러난다.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칠 때, 낙타 털가죽 옷을 입었다. 거칠고 뻣뻣한 낙타털 가죽은 불편하고 볼품없고, 싸다. 검소한 선지자의 외모는 낙타털 가죽옷으로 대표된다.

또 예수님이 재물을 사랑하는 탐심을 경계하면서,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다.

결국 이를 연결하면 구약 때 큰 재산 이었던 낙타는 신약에서 검약과 절제의 상징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구원받은 기독교인은 세례 요한의 질박하고 검소한 옷차림을 본받아야 한다.

가난하고 구질구질 하게 살 필요는 없다. 탐심을 갖지 말라는 말은 돈을 전혀 벌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돈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이 세상의 풍조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새로운 법을 따라야 한다.

세상이 다 바라는 성공, 부요함, 경제적 자유, 부의 증식, 절세, 나의 왕국을 세우는 것, 그러다 보면 남의 것을 부러워 하고 탐내며 질투하게 되는 탐심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도 낙타 옷을 입자. 어려워도 세상과 다른 길을 간 믿음의 선배들을 따라가자.

동물시리즈 2 – 염소, 죄의 문제

(사 11:6-9) 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사 11:6-9) 6 The wolf shall dwell with the lamb, and the leopard shall lie down with the young goat, and the calf and the lion and the fattened calf together; and a little child shall lead them. 7 The cow and the bear shall graze; their young shall lie down together; and the lion shall eat straw like the ox. 8 The nursing child shall play over the hole of the cobra, and the weaned child shall put his hand on the adder’s den. 9 They shall not hurt or destroy in all my holy mountain; for the earth shall be full of the knowledge of the LORD as the waters cover the sea.

염소는 이스라엘 중동지방에서 가장 흔한 동물이다. 양과 함께 염소는 흔한 가축이며, 우리가 치킨 먹듯이 염소, 양고기가 중동사람들의 주식이다.

구약시대에는 사람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동물을 잡아서 희생시키고 제사로 드렸다. 죄없는 동물이 대신 죽은 것으로 나의 죄를 용서받은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감사제나 정기적인 제사때는 수컷을 잡는다. 대장 수컷은 무리 중에 한 마리만 있어도 씨를 퍼뜨리는데 문제가 없다. 그 외의 수컷은 2인자가 되어, 무리에서 중간 역할을 맡지만, 암컷들에 접근하려다가는 대장 수컷에게 혼난다. 게다가 수컷은 한살이 넘으면 사춘기 호르몬 냄새가 심해서 요리하기도 고약하다. 그래서 차라리 쓸모없는 수컷은 1년이 되기 전에, 잡아 먹는 것이 가장 좋다.

따라서 수컷은 10만원, 암컷은 20만원으로 암컷이 더 비싸다. 그래서인지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과 화해하려는 속죄제 제물은 암컷을 죽여 제사로 드린다.

염소와 관련하여 특이한 제도가 아사셀 염소다. 한 염소를 택하여 머리에 안수하면서 죄를 전가하여 죄를 떠 넘기고, 이 염소를 광야로 보내어 멀리 떠나 보낸다. 상징적으로 죄가 멀리 떠나는 상징으로 우리가 거룩해지고 죄를 멀리하는 것을 보여주는 행위다.

레위기 16장 21절 아론은 그의 두 손으로 살아 있는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아뢰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대신 드리는 희생 제물이 되었고, 우리 죄가 용서 받는다.

죄 문제가 해결되면, 비로소 우리가 사는 세상, 죽어서 가는 곳, 하나님이 다스리는 죄가 없고 문제가 없는 완벽한 곳이 바로 천국이 된다. 결국 죄가 없어진 곳이 천국인데, 그 천국에는 갓난 아기 염소와 표범이 함께 누워도 안전하다. 이리와 양, 표범과 염소, 송아지와 젊은 사자, 암소와 곰, 아기와 독사가 평화롭게 공존한다. 해함도 다치는 일도 없다.

전쟁과 미움과 분열과 다툼이 없는 그 천국에 살려면, 그 천국을 만들어 가려면, 우리 안의 죄, 이 세상의 죄를 해결해야 한다. 죄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바이러스가 퍼진 세상처럼 온 세상이 지옥으로 변한다.

죄가 중요하므로, 하나님은 구약 때부터, 제사제도를 통해 우리가 죄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인생의 문제임을 알려주셨다.

당신은 이 죄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가?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가? 우리 대신 죽은 어린 양, 예수님을 통해서 기독교인은 죄를 해결하고 구원받는다. 당신도 죄를 해결하고 천국을 맛보기 바란다.

동물시리즈 1 – 닭, 신과의 만남

(시 91:1-4) 1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2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3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4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

닭이 성경에 많이 나온다. 구약시대 제물로 양과 염소가 일반적이지만, 가난한 사람은 비둘기 등 조류로 드렸다. 느헤미야의 식사기록에도 닭 요리가 있다. 그 때부터 양념치킨이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가장 유명한 닭 이야기는 베드로가 닭이 세번 울기 전에 세번 예수를 부인하는 사건일 것이다. 닭을 키워 본 사람 만이 알 수 있는 것은 수탉은 새벽에만 울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운다는 것이다. 실로 이스라엘과 요르단에서 닭을 키우는 것을 보았다. 성경의 땅에 베드로 닭의 후손들이 뛰어 놀고 있었다.

닭은 아니지만, 닭을 포함하는 조류들은 성경에 더 자주 나온다.

시편에서 사냥군의 올무를 언급한다. 새를 잡기 위해 쳐 놓은 그물에 잡힌 새를 표현하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를 붙잡고 얽어매는 죄와 어려움을 상징한다. 베드로의 부인하는 실수도 결국 죄의 문제다. 하나님을 잘 믿고 싶어도 우리는 닭처럼 멍청하고 약하고 답이 없다.

그럼에도 이런 연약한 우리를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서 품어주신다. 암탉이 그 새끼를 품에 품듯이, 그 날개 깃으로 덮어 보호하신다.

당신은 이런 신이 있는가? 피할 날개 그늘을 찾았는가? 우리를 암탉처럼 보호하고 품어줄 그 신을 만나기 바란다.

인격적 만남은 없습니다. 개인적 만남입니다.

인격적 만남이라는 말이 근거 없고 정체없는 허상임을 아는가?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고, 믿음을 가진 것을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났다고 표현하곤 한다. 80년대 들어 선교단체와 대형교회를 통해 확산된 표현이다. 하나님은 기계적으로 위를 만나지 않고,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면서, 하나님의 그 고상한 인격과 만나서 예수를 영접하고, 내 전인격을 다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바로 인격적 만남이라고 설명해왔다.

그러나 문득 25년째 미국에서 공부하고 번역하고 목회하면서도 그러한 개념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국 어느 책에서도, 인격적 만남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가르침이 없다. 물론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personal 만나는 것이 신앙의 첫걸음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라는 이 단순한 문장을 오직 한국 교회만 ‘인격적 만남’으로 오역해서 사용하며, 원서에는 없는 개념을 덧붙여서 자기 멋대로 은혜받는다는 점에 있다. 인격적 만남이라는 개념이 personal 을 오역했다는 점을 알지 못하면 문제의 원인을 알지 못한다. 인격적 만남이 무엇인지 국어사전을 중심으로 밖에 설명하여 오리무중에 빠지게 된다.

90년대에는 삼위일체 one essence, three persons를 한 본질 세 인격으로 불렀다. 소수만이 괄호 속에서 인격은 오역이며 위격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30년이 지나자 세 위격으로 번역이 고쳐졌다. 그러나 personal relationship 에서 만큼은 이를 개인적 만남으로 번역하는 대신 인격적 만남으로 번역하는 습관이 고쳐지지 않았다. 패커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인격적 만남으로 번역된 모든 문장이 실은 개인적 만남의 오역이었다. 바빙크의 조직신학도 인격적 만남으로 오역했다. 심지어 카톨릭 번역자들에게도 이 습관이 번져, 교황의 메시지도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사귐을 가지라는 평범한 문장을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라는 추상적인 개념으로 번역하고 있다다. 우리가 고쳐야 할 한국교회만의 악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personal 하게 만나자.

첫째, 주님과 개인적으로 만나자. 집단적으로 교회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한 영혼 한영혼 각자 주님을 믿고 구원받아야 한다.

둘째, 주님과 친밀하게 만나자. 사적으로 만나자. 교회를 대표하는 공적인 대표기도도 좋다. 그러나 각자 드리는 사적인 기도를 놓치지 말자. 더욱 친밀하게 주님과 만나 교제하자.

셋째, 주님과 비밀리에 만나자. 공개적으로 만나지 말고 personal하고 은밀하게 만나는 동안 우리의 모든 것을 털어놓고, 주님의 비밀 수업을 받자. 세상이 알 길 없는 개인적인 은혜를 구하자.

정체 불명의 인격적 만남이란 허상을 걷어내고, 개인적으로, 사적으로, 친밀하고, 비밀스럽고, 더 가깝게 주님을 만나자.

(마 28: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Mt 28:7) Then go quickly and tell his disciples that he has risen from the dead, and behold, he is going before you to Galilee; there you will see him. See, I have told you.”

제 15 조 원죄

제 15 조 원죄 Original Sin
우리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원죄original Sin가 인류human race 전체에 퍼져spread throughout 있음을 믿습니다.1 원죄는 인간 본성 전체의 부패corruption이며2 심지어 모태에 있는 유아들에게까지도 미치는 유전적인hereditary 악입니다.3 근원root으로서의 원죄는 인간 안에 있는 모든 종류의 죄를 생산합니다. 그러므로 원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매우 악하며vile 혐오스러워서abominable 인류를 정죄condemn하기에 충분합니다.4 원죄는 없어지지abolished 않으며 심지어 세례로도 근절할eradicated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는 마치 물이 샘에서 솟구쳐 나오는 것처럼 이 무서운 근원woeful source으로부터 지속적으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5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원죄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전가되어imputed 정죄에 이르도록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용서함을 받습니다.6 이 사실은 신자들이 죄 가운데서 평온하게 지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이 부패에 대한 인식the awareness of this corruption이 신자들로 하여금 이 죽을 몸에서부터 구원받기를 탄식하면서groan 간절히eagerly 기다리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 죄가 다만 모방의 문제a matter of imitation일 뿐이라고 말하는 펠라기우스파의 오류를 배격합니다.

1 롬 5:12-14, 19
2 롬 3:10
3 욥 14:4; 시 51:5; 요 3:6
4 엡 2:3
5 롬 7:18-19
6 엡 2:4-5

1. 원죄가 있다고 하면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우리가 억울하게 벌을 받는다고 불평이 나온다. 그러나 인류의 대표로서 지은 아담의 죄가 온 인류에게 전가되었다.

죄의 전가라는 말을 살펴보자. 전가는 떠 넘긴다는 말이다. Imputation of sins. 우리는 죄 중에 잉태되어 어둠 속에서 태어나서 죄의 영향력 아래서 죄를 두려워 하며 살아다 결국 죄의 발톱아래 깔려 죽음에 이른다. 원죄는 상상이 아니다.

로마서 5장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

2. 펠라기우스파는 죄는 모방일 뿐이라 그저 잘 못된 행동을 한 것에 불과하다고 원래부터 죄인 인 것은 없다고 원죄를 부인한다.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악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같은 오류에 빠진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선 문제아를 대하는 경찰관을 놀리면서, 아빠는 주정뱅이고 엄마는 부도덕하여, 어려서 나쁜 이웃에게 영향을 받은 사회의 희생양일 뿐이라고 변명하는 노래가 나온다. 과연 우리의 죄가 나쁜 친구의 영향을 받아 잠깐 잘못된 선택을 한 정도일까?

우리의 적의 위력을 간과하면, 결국 이기지 못한다. 이 깊고 깊어서 대를 이어 전가되는 독한 죄의 힘을 바로 보자. 그래야 이를 이길 유일한 해답을 찾아 죄를 극복할 방도가 나올 것이다.

3. 그러나 전가가 늘 나쁜 것만은 아니다. 원죄가 우리게 전가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승리도 우리에게 전가하셨다. 첫사람 아담의 불순종이 우리를 죄에 들게 했지만,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를 살게 하였다. 그러니 죄의 전가가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의를 떠 안는 의의 전가가 있다. Imputation of Righteousness 이로써 우리는 살 길을 찾는다.

로마서 5장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4. 원죄를 주님이 가져가셨다. 이로써 우리가 저주에서 풀렸다. 망할 운명, 억울한 정죄,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낫다. 이제 주님의 의로 우리를 덮어주신 그 은혜가 계속 우리 위에 머무시도록 기도하며 은혜를 간직하자.

제 14 조 인간의 타락

제 14 조 사람의 창조와 타락, 그리고 사람이 참으로 선한 일을 행할 수 없음
The Creation and Fall of Man and his Incapability of Doing What is Truly Good


우리는 하나님께서 땅ground의 흙dust으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며1 당신의 형상image과 모양likeness, 선good과 의righteous와 거룩holy에 따라 사람을 만드시고 조성하셨음formed을 믿습니다.2 사람의 뜻will은 모든 면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will과 일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높은 지위high position에 있을 때에, 그런 지위를 바르게 인식하지도appreciate 않았고 자신의 탁월함excellency을 가치있게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마귀의 말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고의적으로willfully 죄를 범하였고 결과적으로 사망과 저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3 왜냐하면 그는 사람이 받은 생명의 계명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죄로 인하여 자신의 참된 생명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졌으며, 전체 본성whole nature이 부패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으로 인하여 사람은 육적이고 영적인 죽음physical and spiritual에 대해 자기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습니다liable.4

또 사람은 모든 면에 있어서 악하고wicked 완악하고perverse 부패해져서corrupt, 자신이 이전에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모든 탁월한 은사들excellent gifts을 상실하고,5 다만 몇 가지 작은 흔적traces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만, 그 흔적들은 사람이 변명할 수 없을 정도로inexcusable 충분합니다.6 왜냐하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라는 말씀으로 사도 요한이 인간mankind을 어두움이라고 부른 것처럼,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빛은 변하여 어둠이 되었기 때문입니다.7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자유의지the free will of man와 관련하여 이 가르침과 반대되는 모든 것을 배격reject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죄의 노예slave일 뿐이며(요 8:34), 하늘에서 주신 바가 아니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요 3:2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 6:44)라고 하셨는데, 누가 자기 스스로 어떤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자랑boast하겠습니까?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롬 8:7)라는 사실을 아는데, 누가 감히 자기 자신의 뜻을 찬양glory하겠습니까?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 하나니”(고전 2:14)라는 말씀이 있는데 누가 자기의 지식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요컨대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후 3:5)는 말씀을 알고서야 누가 감히 무엇인가를 주장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도가 말한 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라는 것은 당연히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지켜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주심이 없이는 하나님의 의지will나 이해understanding에 순종conformable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 창 2:7; 3:19; 전 12:7
2 창 1:26-27; 엡 4:24; 골 3:10
3 창 3:16-19; 롬 5:12
4 창 2:17; 엡 2:1; 4:18
5 시 94:11; 롬 3:10; 8:6
6 롬 1:20-21
7 엡 5:8

1.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는 다고 했는데, 왜 아담과 하와는 왜 죽지 않고 추방되었는가? 결국 죽었다. 그의 아들 아벨이 죽을 때 아담도 죽음 같은 슬픔을 겪었다. 살면서 또는 죽어서 육체적 죽음을 피할 길 없었다.

아담의 죽음은 육체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단절된 영적인 죽음도 있었다. 인류의 타락이래 인간은 육체적으로 죽음을 맛보고, 영적으로는 하나님과 단절된 영적인 죽음을 경험한다.

2. 하나님과 원수가 된 인간은 철저히 타락했다. 그럼에도 타락한 인간에게서 선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해도 타락을 부정할 수 없다. 단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에게 남은 선한 창조의 파편일 뿐이다. 인간에게 있는 선한의지 조차 하나님이 심어 주신 것이다. 전적으로 타락한 우리 로서는 어둠에 싸여 하나님과 단절되었다.

3. 자유의지와 혼동하면 안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맞다. 그러나 우리에게 선한 의지가 있다거나 또는 하나님을 선택할 지 거부할 지 의지가 있다고 보면 안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계처럼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창조하지 않고 스스로 순종할 기회를 주었지만, 우리는 이 자유로운 의지를 오용하여 불순종을 택하여 타락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자유의지 개념을 사용할 일이다.

이 자유의지를 오해하여, 우리가 아직도 스스로 선한 것을 택하거나 좋은 일을 도모할 의지가 있다고 해석하면 안 된다. 인간의 전적인 타락은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얻을 길을 택할 수 없다.

4. 내가 구원받은 것은 내가 주님을 영접하고 믿고, 구원받겠다고 선택하여 손들고 일어선 까닭이 아니다. 주님이 죄인인 우리를 먼저 찾아 오셨다. 어둠에 싸여 죽었던 우리가 살 길을 얻은 것은 오로지 주의 은혜다.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Eph 2:8) For by grace you have been saved through faith. And this is not your own doing; it is the gift of G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