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 조: 그리스도의 안에 보이신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하심
완전히 자비로우시고 동시에 매우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시어
불순종할 수 있는 인간의 본성을 취하게 하시고,
그의 가장 무서운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그의 인간 본성으로 죄의 처벌을 감당하게 하셨다.
그의 아들로 우리의 죄를 감당하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에게 자신의 공의를 나타내셨다.
그리고 정작 죄인되어서 멸망을 받아 마땅한 우리에게는
가장 완전한 사랑을 가지사
자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주시어 죽게 하시고,
우리가 죽지아니하고 영생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칭의를 허락하기 위하여
그 아들을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리심으로
자신의 선하심과 자비를 부어주셨다.

십자가형의 고정 고증 고통에 대해 생각해보자.

고증


평화롭게 달린 예수님의 십자가는 오해다.
십자가는 로마 흉악한 죄수에게 가하는 강력한 처형 방법이다.
유명한 검투사 노예들의 반란을 이끌던 스파르타쿠스와 반란 노예 5천여명이 십자가형을 받았다. 아피아 도로끝 까지 10미터 간격으로 매달았다. 처형이면서도 위협 및 전시효과가 컸다. 조선에서 효수형이 있다. 머리를 잘라 성문에 매다는 것과 같다.
로마시대 무덤에서 십자가 처형 때 박았다가 뽑히지 않아서 뼈에 못이 박힌 채로 매장한 유골이 발굴된다. 십자가형의 흔적이다.
십자가 형틀의 종류도 T, +,x 모양으로 다양했다.
물론 넓은 제국이므로 처형자 맘대로 십자가 형의 종류와 방법과 절차는 달랐다. 처형집행자의 습관과 관행에 따라 방법이 달라진다.

고정

그러나 고정하는 방법을 생각해보면 어떤 식으로 예수님이 달리셨는지 상상할 수 있다.
하체와 상체만 다루자.
발가락 사이에 두 발을 겹쳐서 고상하게 박은 것이 아니다. 두 발이 허공에 떠있어서는 몸의 체중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상상은 발 받침대가 있었다고도 한다.

못하나로 발을 박을 경우 고정이 문제다. 고통에 몸부림쳐서 발가락이 찢어지고 못에서 빠져나오면 낭패다. 발이 빠지면 몸무게로 팔도 빠져서 몸이 땅으로 떨어진다. 십자가형을 받은 죄수는 반드시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 이것이 형집행자의 의무다. 피범벅이되어 떨어진 죄수를 다시 매달려면 몹시 힘들고 귀찮다. 대신 발뒤꿈치 복숭아 뼈 바로 밑에 못을 박으면 튼튼하게 고정된다. 발뒤꿈치에 못이 박힌 유골이 여럿 발굴되는 것도 여러 방식중에 이런 방식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문제는 예수님의 뼈가 부러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출애굽기 유월절 어린양을 먹으며 뼈를 부러뜨리지 않는 이유가 나중에 예수님의 처형에서 뼈가 상하지 않는 것으로 연관지어 이해했다.
즉 발뒤꿈치에 못을 박으면 뼈가 상한다. 그러므로 발가락 사이에 못을 박고 대신, 발 아래 발받침대를 대는 방식을 사용했을 것이라고 보아도 좋겠다.

상체는 양손에 못 두개를 박은 것으로 상상한다. 그런데 고정이 쉽지 않다. 손바닥에 박으면 몸무게로 인해 손바닥이 찢어지고 몸이 아래로 떨어질 것이다. 그래서 팔을 줄로 묶는 방법을 생각한다. 줄로 단단히 묶으면 못은 거들뿐이다.
손에 못이 박힌 구멍이 있으므로, 못을 박기는 했을 것이다만, 밧줄로 팔을 묶었을까? 처형인에게 가장 쉽고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못 두개로 확실하게 고정하는 방법이 있긴하다.
그것은 팔목뼈 두개가 모이는 지점을 밖는 것이다. 그러면 뼈도 부러지지 않고, 손바닥이 아니라, 손목에 밖는 것으로 상체가 단단히 고정된다.

고통

손목은 신경다발이 지나가는 곳으로 다치면 매우 아프다. 팔뒤꿈치를 부딪치면 고통스러운데 그것과 같다. 단지 그 신경다발을 집게로 집어서 짖이긴 다음에 집게를 비트는 정도의 심한 고통이 더 할 뿐이다.
처형자에게는 쉽고 간편하며, 죄수에게는 고통을 안겨주므로 처형의도에 부합한다.

십자가에 매달아 두면 결국 죄수는 죽는다. 진이 빠지고 피를 흘려 죽는 것이 아니라, 질식사다. 매달린 죄수는 고통속에서도 숨쉬기 위해 발에 힘주고 상체를 들어올려 숨을 들이 마신다. 몸이 쳐지며 숨을 내쉰 다음에 다시 발에 힘주고 숨을 들이 마셔야 한다. 이 과정이 고통스럽다. 결국 조금씩 숨이 모자라며 힘이 빠진다. 그러다 들어 올릴 힘이 없으면 질식해 죽는다.
평소 단련된 건장한 산적두목은 십자가에 달려서도 오래 버틸수 있다. 며칠이고 매달리며 사는 게 고통스럽다. 처형자에게도 이는 골치거리다. 정한 날까지 죽어야 시체를 내리고 퇴근할 게 아닌가.
그래서 빨리 죽게 하려고, 종아리 뼈를 부러뜨린다. 그러면 몸을 들어올리지 못하고, 숨이 막혀 죽게 된다. 모질게 고통스런 호흡을 계속하던 죄수도 원하던 자비로운 행동이다.

예수님은 유월절 명절이 시작되는 금요일에 처형되었으므로, 그날 오후까지는 사망해야 했다. 처형집행자는 오후까지 죽지 않을 겨우, 다리를 뿌러뜨리고, 숨이 막혀 죽게 한 뒤에, 시신을 인도하여야 퇴근하여 명절 식사에 참석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예수님은 3시에 이미 숨을 거두셨다. 그래서 다리뼈가 상하지 않고 시체를 모셔다가 매장할 수 있었다.

십자가의 이유


문제는 이런 고통스런 십자가를 주님이 지신 이유다.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면서, 우리를 살리려면, 자격 있는 누군가 대신 우리의 죄를 져야 한다.
우리의 죄 만큼의 벌을 받아야 하는데, 우리 죄의 값은 사망이다.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주님이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셨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이 크면 큰 만큼 우리가 받았어야 하는 벌이 얼마나 큰지 보여준다.

동시에 십자가는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이다. 그 고통이 크면 클 수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 보여준다. 죄 없는 하나님이 이런 고통을 직접 대신 받으시면서까지 우리를 살리셨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보여주는 길이었다.

요한복음 3: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 멸망과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아들을 세상에 내어주셨다.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기억하자. 그가 우리를 살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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