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4장, 두려워도 둔해지지는 말자

1 갈릴리 호수는 워싱턴 호수의 절반 길이지만 너비는 네 배다. 총 넓이 두배다. 워싱턴 호수를 반으로 접은 것을 옆으로 넷을 늘어놓으면 크기가 비슷하다. 큰 호수라 가끔 파도가 심하게 인다.

2 본문의 사건은 두가지다. 먼저 주님이 바다를 건너신다. 서양의 현대 무신론자들은 신적능력에 대해 의구심을 가진다. 그러나 동양의 신자들은 종교에서 일어나는 기적현상에 대해 익숙하다. 타 종교에도 기적이 일어난다.

우리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며 나의 주로 믿고 고백하는 이유는 단지 그가 행하신 기적 때문 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시고 지금도 그를 믿는 제자들 가운데 기적을 베푸심을 믿는다.

3 둘째 사건은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것이다. 예수님이 명하시니, 심지어 보통 인간인 베드로도 물 위를 걸어 갈 수 있었다. 단 몇 걸음이지만 예수님처럼 성공적으로 바다 위를 걸어서 기적의 일부가 되었다. 이처럼 신자도 주님과 동행하며 물 위를 걷는 것 같은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 우리 뜻대로가 아니라 주님이 명하시면 기적 사건의 일부가 된다. 간증이 많다.

4 그러다 물살을 보고 무서워 하여 빠지기 시작했다. 살려달라 외치니 주께서 손을 내밀어 건지셨다. 문제는 베드로가 무서워했기 때문이다. 31절에서는 주님이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말하신다. 무서운 것을 보고 무서워했는데 무엇이 잘못인가? 그러나 주님이 책망하신 것은 무서워 하는 감정이 아니었다. 믿음이 작은 것을 책망하신다. 대체 주님이 원하시는 믿음이란 어떤 믿음인가? 삼위일체 신앙? 죄사함의 믿음? 부활의 믿음?

5 같은 사건을 기록한 요한복음 6장에선 제자들의 둔한 마음을 책망하신다. (요 6:52)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풍랑을 보고 무서워 한 것 보다 더 큰 문제는, 배 타기 전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신 주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무서움에 자신을 내어 맡긴 제자들의 모습이다. 이런 마음이 둔하다 책망받는다. 기억하지 못함, 두려움에 휩싸임, 물에 빠짐, 작은 믿음이 하나로 연결된다.

6 쉽게 잊는 우리가 행하는 매일 묵상과 주일 예배와 설교의 목표 중 한가지가 바로 이전에 하신 하나님의 크신 일을 ‘다시 기억하기’ 위함이다. 설교자는 바로 이렇게 하신 주님의 능력을 기억하도록 돕는 역할이다. 둔해진 마음을 깨치고 물위를 걸으신 주님을 본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듯이, 주님의 능력을 다시 기억할 때 깨어 있는 제자가 된다.

7 무서울 수는 있다. 그러나 믿음이 작아져서는 안된다. 풍랑이 일어도, 우리는 오병이어 기적의 주님의 능력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순간이 온다. 그러나 기적을 행하시는 주님을 잊지 말자. 물론 무서울 수 있다. 안심하고 두려워 말자. 마음이 둔해지지 말자. 원하신다면 능히 우리로 하여금 바다 위를 걷게 하실 능력의 주님을 기억하자. 떡 떼시던 기적과 신비로운 주님을 기억하자. 주가 행하신다. 둔해지지 말자.

(마 14:22-33) 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마 13장, 자유주의 신학은 무엇인가?

200년 전 유럽에서 시작된 자유주의 신학을 호환 마마 불법비디오 같이 여기는 때가 있었다. 공과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 자유주의 신학의 특징을 1 저자/연대문제, 2 문서설, 3 비신화화 로 정리할 수 있다.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저자와 저술 시대를 전통적인 이해와 달리한다. 모세오경을 모세가 쓴 것이 아니고, 포로에서 돌아온 뒤에 쓴 작품으로 본다. 돌아 간 뒤에는 율법을 단연코 잘 지키리라고 맹세하던 귀환 이스라엘의 심정으로 보면, 지루한 신명기의 율법도 절절한 신앙고백이 된다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문서설은 독일 의사가 발견한 것인데, 성경에 하나님 부분과 여호와 하나님 부분이 있음을 지적한다. 성경 편찬자들이 구전으로 내려오던 성경을 집대성 할 때, 서로 다른 이야기 스타일이 있음을 발견하였고, 하나님(엘로힘)이 등장하는 문서를 E 문서, 여호와 부분은 J 문서, 율법부분은 D 문서, 제사장 업무 수첩 같은 내용은 P 문서로 구분하였다. 각 문서가 특징과 가치가 있어서, 어느 하나를 취사선택하지 않고 모든 문서를 시대별로 적절히 다 넣어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이 주어가 된 부분은 간략하고 조직적이고 요약과 같다. 2~4장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야기는 기승전결 우여곡절 감정이입이 많고 세부사항이 많다. 하나님과 여호와 하나님의 차이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다.

비신화화는 산업혁명과 근대화 전후 등장한 무신론자들에게 성경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오랜 신화 같이 비합리적 비과학적으로 보이는 성경의 많은 기적을 배제하고 기독교의 중심을 전하자는 시도다. 어떤 이에게는 이런 비신화화 작업이 하나님을 믿는데 도움이 되었다.

오병이어 본문을 보면서도 예수님의 능력과 기적을 배제하고 읽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요한복음 6장에는 한 어린아이에게 떡과 물고기가 있었다 기록한다. 이를 토대로 한 아이가 자기가 먹을 도시락을 내어 놓으니, 사람들이 이에 감동받아 저마다 자기 도시락을 내어 놓아 모두가 함께 먹고 풍성히 나누었다는 나눔의 기적이 오병이어의 진실이라고 해석한다.

자유주의 신학이 가치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문을 건성으로 읽는 것은 중대한 약점이다. 이미 앞에서 빌립과 제자들은 5천명을 먹이려면 ‘조금씩 나눠 먹더라도’ 200데나리온이 부족하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이천만원 정도 식대가 필요하다고 계산하며 고민했다는 점은 간과한다. 비신화화 한다고 하여 기적을 기적이라고 부르지 못하니, 성경 본문을 띄엄띄엄 읽게 된다. 결론이 아무리 그럴 듯해도, 본문에 정확히 기초하지 않는 해석은 사람의 말에 불과하다.

자유주의 신학이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 또한 그 한계도 있다. 자유주의 신학을 무서워 하지 말고, 백안시 하지 말고, 맹신하지도 말고, 한 손에 성경과 한 손에 신문과 책을 들고 여러가지 유익한 도구를 다 습득하는데 게으르지 말자.

끝으로 오병이어의 부스러기에 대해 묵상해보자. 다 먹고 난 부스러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 주님은 이를 버리지 말고 잘 간수하라고 하셨다. (요6:12) 길을 가면서 제자들과 함께 먹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기적을 베푸시는 주님이 평시에는 이 부스러기를 먹으면서 가셨다. 주님이 우리를 기적으로 살리실 때가 있다. 그러나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부스러기를 먹으며 걸어가라고 하실 때가 있다. 그러다 또 필요하시면 퍽퍽한 우리 삶에 오병이어 풍성한 기적을 베푸실 것을 기대하며 따라 가자.

(마 14:13-21) 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1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17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18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20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요 6:3-13) 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마 13장, 값진 진주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0) 비유를 읽는 법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밭주인에게 알리지 않고, 자기 소유를 팔아 그 밭은 산 비유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합니다. 물론 주인에게 보물의 존재를 알리지 않아도 밭거래는 불법은 아닙니다. 그러나 윤리적으로 정당한지에 의문이 듭니다. 이웃의 밭이라면 더욱 보물의 존재를 알렸어야 하지 않을까 고민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는 그런 식으로 읽으면 안됩니다. 누가 ‘양식만 먹다가 김치를 먹으니 참 좋다’ 말했다고 합시다. 이를 ‘김치를 먹는 그는 채식주의자이다’ 또는 ‘빨간 김치를 좋아하는 것을 보니 붉은 악마 축구를 좋아한다’는 식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만약 대입시험의 지문을 이런 방식으로 해석하면 ‘지나치게 깊이 생각한 오류’라고 말할 것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유를 통해 말하시려는 그 중심 의미가 중요합니다. 그 외의 것을 생각하느라 지나치게 깊이 생각하면 길을 잃을 수 밖에 없습니다.

(1) 지금 즉시

아주 귀한 것을 발견한 사람은 ‘즉시’ 돌아가 자기 ‘모든 재산’을 다 팔아 그 땅을 삽니다. 좋은 진주를 발견한 사람은 ‘즉시’ ‘자기 모든 소유를 팔아’ 그 진주를 확보합니다. 세상이 그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귀한 진리를 만난 사람은, 생각하느라 질질 끌지 않고 즉시 행동에 옮깁니다. 머뭇거리는 순간 물건은 다른 이에게 팔립니다. 기회가 늘 있지 않습니다. 그 가격이 얼마가 되었든 자기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즉시 확보하고야 맙니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거래를 마무리하는 순간, 엄청난 이익을 볼 것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난 복음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죄인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와 만나는 순간이 있었다면, 그 순간은 바로 진주장사가 생애 최고의 진주를 만난 운명의 시간입니다. 대학에 들어간 뒤에, 아이들 다 키우고 나서 여유가 생기면 그 때 믿어보겠다 하면 늦습니다. 우리는 다행히 그 진가를 알아보고, 자신의 전재산보다 소중한 영혼을 내던져, 주님을 주인으로 모셨습니다. 조금이라도 머뭇거렸다면 그와 만나는데 무척 오랜 시간이 걸렸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주님을 선택했습니다. 다행입니다.

(2) 내 소유 전부

집을 다 팔아 보석을 샀습니다. 집을 어떻게 하루만에 다 팔 수 잇는가, 보석 사고 남은 돈은 무엇을 할지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이미 말했습니다. 그가 가진 가장 큰 재산과 바꾸어 살 정도로 값진 보석입니다.

내 삶의 일부만 드려 기독교인이 된다거나, 한 발을 이 땅에 두고 한 발만 예수님께 두는 식으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최고의 보석 진리를 얻으려면, 온 몸과 인생을 다 드려야 합니다.

(3) 그 보석 전부

내가 보석을 살 때, 보석의 일부만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신 거룩한 예수님은 좋은데, 인간적인 예수님은 제외하고 반쪽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다 좋은데,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유일한 진리라는 독선만 없으면 좋겠다는 사람은 아직 예수님을 다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 우리는 참 진리이신 주님 전체를 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4) 보석을 가진 자

고린도후서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모든 것과 바꿀 만한 귀한 주님을 모신 여러분, 이 값진 보물을 소중이 다루십시오. 이 믿음은 다른 사람은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땅에 묻어두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다행히도 이 가치를 알아보고 이 진리를 획득했습니다. 귀히 모셔 두고, 대접하고, 보존합시다. 아무도 우리 행실 때문에 우리가 간직한 진주의 가치마처 깎아내리지 못하게 합시다. 이 귀한 보물을 품은 그릇인 여러분, 이 가치에 합당하게 살아갑시다.

마 13장, 당분간 가라지도 함께 있답니다.

마태복음을 통해 우리는 천국에 대하여 더 많이 배울 수 있습니다.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 주님은 하나님이 만드신 이 땅에 사탄이 뿌린 악한 자의 자녀가 함께 자라다가 마지막 때에 심판하여 곡식을 추수하신다 풀어 주십니다. 이 비유에서 놓칠 수 없는 것이 좋은 곡식과 잡초의 유사성입니다. 이 유사성 때문에, 일꾼이 잡초를 뽑다 곡식까지 다칠까 봐 주님은 추수 때까지 김매기를 미루십니다. 우리 교회 안과 주변에 유사 기독교, 비슷한 가짜 신앙이 횡횡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곡식과 가라지 비유는 어떤 위로를 줍니까?

1. 교인이라고 무턱대고 믿어서는 안됩니다. 모든 신자 안에 성령께서 살아 계시지만, 모든 신자들이 항상 성령으로 충만해 있지는 않습니다. 비슷해 보이는 잡초같은 신자, 가라지와 같은 운명이 될 종교인, 모양만 같은 교회, 유사 종교를 주의하십시오.

2. 교회의 거룩함을 추구하되 기대하지는 마십시오. 청교도가 이 땅에서 지상낙원을 건설하려다 실패했습니다. 순결한 교회를 꿈꾸되, 교회의 혼란을 보고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교회는 병원 같아서, 의사, 간호사, 간병인 외에도 외래환자, 중환자, 응급환자, 보호자, 구경꾼, 사기꾼이 다 모여 있습니다. 주님은 이런 병자를 위해 오셨습니다.

3. 낙심하지는 마십시오. 이 비유를 알려주신 것은 우리가 절망하여 낙심하고 포기하게 하심이 아니라, 경계하며 소망가운데 천국길을 계속 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어지는 비유에서 천국은, 나중에는 크게 자랄 겨자씨와 같다고 했습니다. 느끼지 못해도 천국은 조금씩 자라고 있습니다.

4. 작은 변화와 성장을 기뻐하십시오. 당장 천국의 성장을 실감하지 못해도 천국은 자라고 이깁니다. 우리는 천국에 날로 가까워 집니다. 생활에서 믿음으로 이긴 작은 승리와 변화를 기뻐하고 축하하십시오. 천국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워 질 것 입니다. 생명의 영이신 주님의 성령이 함께 하셔서 이 길을 쉽게 걷도록 도우십니다.

13:29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31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 13장, 천국 길의 장애물

씨 뿌리는 자를 통해 본 천국가는 우리를 방해하는 것들을 생각해 봅시다.

1. 영적인 장애 – 복음으로부터 소외된 존재 – 타종교인 불신자인 등은 나면서부터 천국과 멀어진 상태입니다. 무신론자 부모 밑에서 자라거나, 미전도 오지에서 태어난 경우는 어쩔 수 없이 복음과 먼 상태입니다. 마치 새가 와서 씨를 먹어 치우는 것처럼 복음이 발붙일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2. 환경적 장애 – 살면서 마주치는 박해, 인생의 어려움으로 넘어집니다. 어떤 이의 간증을 들어보면 아주 어려운 때 하나님을 찾는다지만 사실상 드문 경우죠. 불신가정에서 어려움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기독교에 관심을 갖기란 쉽지 않습니다. 마치 돌밭에 뿌린 씨처럼 뿌리내기리 어렵습니다. 환경의 어려움은 있던 믿음마저 마르게 하는 경향이 큽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을 당할 때는 더욱 주를 찾고 말씀에 붙어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3 내면의 장애 – 한번 씨가 뿌리를 내렸더라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 신자의 성장을 막는 가장 대표적인 장애물로 등장한 것은 이생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입니다. 내일 일에 대한 두려움, 더 많은 돈과 힘을 향한 유혹이 불쑥 솟아오릅니다. 오는 유혹을 막을 수는 없지만 방치하면, 들을 점령한 블랙베리 가시처럼 온통 땅을 덮어 어떤 다른 식물이 자랄 수 없는 황무지가 되게 합니다. 물론 블랙베리에 점령당한 밭도 멀리서 보면 신선한 푸른 색입니다. 멀리서 보면 멋진 자연인데, 날것 그대로의 접근할 수 없고 추수할 것 아무것도 없는 빈 땅인 것처럼 내면이 황폐한 신자는 열매맺지 못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귀한 말씀의 씨를 받고 보존하여 지금까지 이를 수 있었습니까? 이야말로 신비로운 기적입니다. 아무나 깨달을 수 없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비유입니다. (16절) 즉 씨가 뿌려졌다고 해서 모두 결실하지 않습니다. 깨닫고 보고 듣고 깨닫는 기적은 아무에게나 주어진 특권이 아니므로, 사탄과 환경과 내면의 고민이 우리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이 귀한 믿음의 싹을 잘 가꾸고 돌보아 갑시다.

마 12장, 우리를 받아 주셨듯이

제자들이 길가다 안식일에 밀이삭을 뜯어서 먹은 일로 바리새인이 비방했을 때, 예수님은 인자는 (율법의 종이 아니라) 안식일의 주인이라 하셨습니다. 또 안식일에 손 마른 병자를 고치시는지 아니면 안식일 규례를 잘 지키는지 지켜보는 바리새인의 시선을 아시고도, 주님은 ‘안식일이라도 마땅히 위기에 처한 양을 구조해야 한다’고 일축하시고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회당에서 나간 그날, 안식일 오후에 수많은 병자를 고치십니다. 오늘은 안되고 내일 오라고 돌려 보내지 않고, 즉시 도움의 손길을 내어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는 이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위리 곁의 연약한 자들이 주님께 나올 때 우리 기존신자들은 바리새인이 되어 그들 앞에 장애물을 놓지는 않습니까? 말로는 모두 환영한다고 하지만, 정작 술, 담배, 장애인, 동성애 등 다양한 이슈들이 무서워 내심 주저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생각합시다. 주님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병자의 필요를 보았을 때, 즉시 고쳐주셨습니다. 담배를 끊고 난 뒤에 교회에 오라거나, 당신의 삶에서 모든 죄를 회개하고 바로잡은 다음에 교회에 나오라고 밀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부정한 자, 병든 자, 회당에서 환영받지 못하던 사람들에게 기꺼이 손을 내미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님의 행보는 이방인들에게 소망을 주는 복음 방식이었습니다.

만약 주님이 준비된 사람만 만나셨다면 우리는 결코 신자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방인으로서, 하나님과 원수되고, 죄로 죽었던 우리들이야 말로, 가장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가장 갈급한 그 때, 주님은 미루지 않으시고, 다음에 오라고 밀어내지 않으시고, 즉시 우리를 만나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큰 은혜를 입어 신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곁의 이방인, 죄인, 병자, 이웃들을 주님께서 우리를 받아 주신 방식으로 대해줍시다. 누구든지 겸손히 주께 나아와 도우심을 구하면, 사람의 시선과 뒷일을 고려하지 말고, 즉시, 있는 모습 그대로 그들의 손잡아 줍시다. 이해하지 못하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하나님은 이를 기뻐하실 겁니다.

마 12:1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18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마 28장, 두려워 말고 기뻐만하라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보며, 갈 길을 잃은 제자들에겐 대안이 없었습니다. 대안이 없이 막막할 때 우리의 감정은 두려움과 슬픔과, 난처함과 답답함으로 범벅이 됩니다.

일요일 새벽에 두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보기 위해 왔을 때, 지진이 나고, 군병들이 요동하며, 천사를 보았습니다. 간담이 서늘한 새벽에 여인들은 두려웠습니다.

천사의 말은 두려워 하지 말라 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 제자들에게 알리려 달려 가는 여인들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무서움과 기쁨이 교차했습니다.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여인들을 만나 하신 말씀도, 무서워 하지 말라 였습니다.

자기 계획대로 살지 않고 주님의 이끄심을 따라 사는 제자들의 삶은 숭고하지만, 제자들의 마음에는 기쁨과 두려움이 혼재합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무서움과 기쁨에서 무서움을 빼면, 기쁨만 남습니다. 제자의 길은 험하고 곤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쁨으로 그 길을 가기 원하십니다.

마 28: 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9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10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여호수아 1:9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마 11장, 드러내어 계시해 주소서

27절에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를 본 자가 없다.’는 말에서 나온 ‘계시’는 익숙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쉬운 말로는 25절의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과 같은 말입니다. 즉 계시란 Reavel 드러내 보이시고 나타내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요한이 본 계시의 말씀을 요한계시록이라 하고, 영어로는 리빌레이션이라고 합니다.

높은 차원의 신이 작정하고 숨으면 아무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셔야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어느 교회나, 찬양이나, 목사의 설교가 주를 보여 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자신을 선택한 사람에게 일정부분만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당사자만이 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도, 주위의 사람들은 듣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세례 때 요한이 들은 음성이나, 바울의 회심 때 들은 음성을 곁에 선 다른 사람은 듣지 못했습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이 드러내시지 않으셨습니다.

드러내 주시는 만큼만 알 수 있습니다. 신자가 한번 하나님을 알았다고 하나님을 전부 다 안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장하는 만큼 더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매일의 묵상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면, 그 만큼 주님의 신비를 더 드러내어 보여주신 셈입니다. 이 은혜를 날마다 사모합시다. 주의 계시를 구합시다.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 6장,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와 구제와 금식이 나쁜 것이 아니지만,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꾸짖은 까닭은 그들의 잘못된 동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에게 보이려고’ 행하는 태도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행하면 책망을 들을 뿐입니다.

기도와 구제와 금식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지만, 우리는 사람에게가 아닌 하나님께 보이려는 동기이므로, 골방에서, 오른손이 모르게, 슬픈 기색을 띄지 않고 합니다.

우리는 의를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거리에서 한다면, 외식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자기 상을 사람들의 헛된 칭찬으로 이미 다 받았습니다. 

우리가 받을 상을 하늘에 쌓아둡시다. 아버지가 주시는 상 받기를 사모합시다. 그러려면 아버지 앞에서 기도하고, 아버지 앞에서 구제하고 금식과 모든 종교활동을 드립시다. 사람 앞에서, 사람에게가 아니고요.

(마 6:) 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

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 5장, 산상수훈은 율법이 아닙니다.

산상수훈은 해학이자, 통찰력있는 시대비평입니다. 

5장부터 7장까지 산상수훈 중에서 “바리새인은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너희에게 말하지만,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는 식의 예수님의 말씀이 여러차례 반복됩니다.

바리새인의 지나친 율법강요를 주님은 한 껏 뒤틀어서 더욱 극단적인 예를 드심으로써 이들의 비현실성을 꼬집습니다. 이렇게 극단적인 예를 듣고 보니, 백성들은 비로소, 그전에는 딱히 뭐라 대꾸할 수 없던 바리새인의 율법주의가 잘 못되었다고 외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옳소’ 하며 공감합니다.

예수님의 비꼼을 보면, 차라리 눈을 빼버려라, 연자맷돌을 지고 물에 빠져라, 네 눈의 대들보를 먼저 빼어라는 식의 웃긴 장면이 많습니다. 만화로나 그릴 수 있을 법한 이런 생생한 예를 드심으로써 대번에 바리새인의 위선을 드러내십니다.

백성들은 이 권세있는 가르침에 기뻐하였고, 아직도 두 눈을 뽑지 않은 바리새인은 이를 갈며 괘씸해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또다시 산상수훈을 문자적으로, 율법적으로, 또 하나의 율법으로 만들지 맙시다. 예수님의 말씀은 오른뺨도 돌려대고, 십리까지 가주고, 겉옷도 내어주라눈 또 하나의 율법이 아닙니다. 모든 율법에서 자유로와지고, 대신 주님의 제자들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율법의 정신을 지키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주님의 방식대로 따라갑시다.

마 5: 27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