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5장, 난제 풀기 – 오병이어와 칠병이어

마태복음 14장 15-21에는 오병이어 기적이 나온다. 오병이어 기적은 마태 14장은 물론 마가복음 6장, 누가복음 9장과 요한복음 6장에도 나온다. 네 명의 제자들이 기억하고 빼놓지 않고 기록할 만큼 이 기적은 진짜 있었던 사실 같다.

그런데 마태복음 15 29-39장에는 칠병이어 기적이 나온다. 마가복음 8장에도 나온다. 두 사건이 빵의 갯수도 다르고 먹인 사람도 5천이 아니라 4천이다. 남은 부스러기도 12광주리와 7광주리다. 행한 장소도 갈릴리 유대인 지역과 데가볼리 이방인 지역으로 다르다. 즉 갈릴리 동쪽과 서쪽이다.

신학교에선 이를 어떻게 해석하는가? 네가지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1. 원래 둘 다 없었다. 이건 무신론자의 비방이다. 성경의 기록된 기적을 인정하지 않는 방식은 받아 들일 수 없다. 기적을 다 빼고 신비를 제하면, 종교 행위와 심리적 위로만 남을 뿐이다. 생명의 기독교는 만날 수 없다.

2. 한 번만 있었지만, 제자들이 착각해서 두 번 기록했다. 두 사건의 정황이 아주 비슷하다. 많은 사람들, 적은 음식, 풍성히 먹은 기적, 남은 음식을 바구니에 담은 것. 같은 사건을 두 번 기록한 것이다. 그러려면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네 제자들이 모두 착각해서 적었다고 가정해야 하는데 이를 해결책이라고 보기 쉽지 않다.

3. 더 그럴듯한 해석은, 비슷한 기적이 두 차례 있었다. 한번은 오병이어로 5천을 먹이고 또 한번은 칠병이어로 4천을 먹이셨다. 누가 요한은 오병이어만 기록했고, 마태와 마가는 칠병이어까지 기억해서 오병이어와 함께 기록했다. 왜 제자들이 기록이 혼선을 빚는지 대답이 궁하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이런 서로 다른 복음서를 읽으며 혼란을 어떻게 정리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만약 문자적으로 예수의 일생을 복원하는 도구로 복음서를 읽었다면, 넷 중에서 가장 정확한 복음서를 선택하느라 매우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더 정확한 성경과 덜 정확한 성경이 있는 셈이니, 성경 66권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믿는 것이 아니게 된다.

4. 또 다른 대답은, 오병이어와 칠병이어 사건 같은 기적은 더 많이 있었다. 요한복음 마지막에서 요한은 예수님의 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지만 다 기록하지 못했다고 한다. 만약 다 기록한다면 그 기록이 넘쳐서 이 땅에 쌓을 곳이 없다 한다. 고치신 병자의 수가 헤아릴 수 없고, 오병이어 같은 기적도 한번이 아니라, 두 번 혹은 오병이어 칠병이어 십병구어 등 여러 번 있었지만 다 기록하지 못했다는 해석이다. 차라리 이게 우리 신앙경험과 유사하다.

우리 삶에 기적이 온다. 그런데 정황이 비슷하다. 간만에 찾아온 평온, 그러다 갑자기 생기는 위기상황, 수습이 안되는 절망감, 하나님께 드리는 간절한 기도, 광야에 길을 내시며 물을 가르시는 기적의 하나님, 하나님을 찬양 평화로운 상태. 이것이 반복된다.

그래서 우리는 오병이어 기적을 경험한다. 그리고 다음에 칠병이어 기적을 경험한다. 다른 사건이지만 결국 같은 패턴이다. 그 다음엔 구병이어, 이십병구어 기적을 만날 것이다. 우리는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고, 갈릴리 바다를 걷고, 망했다가 일어서고, 죽었다가 살아난다. 신앙의 여정을 가는 동안 우리는 주님과 함께 기적을 여러차례 경험한다. 같은 패턴이다. 주님이 원하신다. 그러므로 광야에서 굶주렸을 때, 떡을 떼시던 주님을 기억하자. 하나님의 오른팔을 잊지 말자.

마 16장 8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9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10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마 15:32-39) 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33 제자들이 이르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35 예수께서 무리에게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36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37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38 먹은 자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39 예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으로 가시니라

마 28장, 이상한 선교사

1. 좋은 선교사는 편견없이, 가서 그들의 언어 배우고 그들 옷 입고, 함께 살며 생활하며 복음 전한다. 그들 자녀는 아이들과 함께 논다. 그러나 나쁜 선교사는 가서 선교사 캠프 안에서 미국식으로 산다. 미국에서 온 여행자들을 위해 설교한다. 아이들은 기독교학교 보내고, 영어만 쓴다. 만약 선교사 된다면 어떤 선교사가 되어야 할까? 우리는 좋은 선교사인가?

2. 마태 28장 지상명령 제목 달린 유명구절이다. 예수님의 가장 마지막 명령이고 가장 중요한 명령으로 간주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이다. 이 구절을 이미 알고 있는 우리는, 왜 가지 않고 여기 있는가? 선교사 되려 고민했나? 선교부 전화해봤나? 3000불 비행기표 샀나? 아니라면 문제다. 

예수님의 가장 큰 명령으로 알고 외우면서, 왜 순종하지 않는가? 왜 가지 않고 여기 있는가? 가라 하셨지만. 그런데 우린 남았다. 불순종이다. 우리 모두 문제가 있다.

3.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문제 가운데 있기 원치 않으셨다. 불순종하는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세상을 바꾸셨다. 세계화로 세상이 달라졌다. 온 세상이 먼로에 있다. 멕시칸 푸드, 베트남 레스토랑, 코리안 테리야끼, 일본 스시, 타일랜드 음식, 몽골, 카자흐스탄, 아르메니아, 터키, 이디오피아, 콩고. 온 세계에서 미국으로 찾아온다, 먼로가 세계화 되었다. 지난 70년간 세상이 변했다.

4. 가장 큰 변화는 미국은 더이상 기독교 국가가 아니고 미국은 가장 큰 선교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미국인구는 중국 인도 다음으로 세번째다. 미국 종교인구가 50%이하로 떨어졌다. 즉 300 밀리언 이상 인구의 절반이 비종교인이고, 기독교인은 40%에 불과하다. 즉 미국에만 200만의 비기독교인이 있다. 이는 미국이 전세계 5번째 큰 선교지라는 말이다,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다음으로 큰 선교지다. 그 다음 인구순위 대국인 브라질 이디오피아의 총인구에 버금갈 정도로 불신자가 많은 선교지다. 세계화가 표준이 되었고, 워싱턴주 변두리인 먼로도 세계화되었다. 온 세계가 우리 이웃이 되었다.

5. 불신자가 많은 곳에 사는 크리스천은 무엇을 해야 하나? 전도해야 한다. 선교지에 사는 성숙한 크리스천을 무어라 부르나? 선교사라고 부른다. 불신자에 둘러싸인 먼로에 사는 기독교인인 바로 우리가 선교사다.  그런데도 우리는 먼로에 살면서, 먼로가 선교지인줄 모르고, 자기가 선교사인줄 모르는 선교사, 즉 이상한 선교사다. 이상한 상황에 이상한 방법으로 이상하게 행동하는 선교사다.

우리는 선교부에 전화하지 않았고, 선교자 지원서 서명 않았고, 3000불 비행기표 사지 않았고, 6개월 현지어를 공부하지 않았지만, 떠나지도 않았는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선교사 되게 하셨다. 가라는 명령에 순종하게 만드셨다.

우리는 이상한 선교사다. 우리는 불순종했지만, 주님은 우리 홈타운을 선교지로 바꾸셨다. 우리는 불순종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가 가지 않으니 대신 세상 모든 민족을 우리에게 데려오셨다. 

6.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번째 기회를 주셨다. 이제는 순종하자. 비행기를 탈 필요 없다. 모든 민족이 우리에게 와 있다. 길 하나만 건너 이웃집에 가면 된다. 언어를 배울 필요 없다. 그들이 영어를 알고 있다. 성경을 번역할 필요 없다. 휴대폰 안에 다 있다. 우리가 할 한가지 일은 선교사의 일을 하는 것 뿐이다. 이 두번째 기회를 잃지 마라. 이상한 경로로 이상한, 이왕 선교지에 살면서 선교사가 되었으니, 선교사가 되려면 좋은 선교사가 되자.

7. 좋은 선교사가 되기를 동의한다면. 이제 우리 교회는 기독교인의 사교모임이 아니라 먼로에 위치하며, 먼로, 우든빌, 술탄, 인덱스, 스노호미쉬, 레익스티븐슨, 메리스빌 그 이상의 불신자를 위해 일하는 선교사들의 모임이다. 하나님이 여기에 있는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실 것이다. 우리가 우리 일을 하면, 예수님도 그의 일을 할 것이다. 바로, 마태복음의 마지막 구절의 약속이다. 보라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 Behold, I am with you always to the end of the age.

마태복음 28장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And Jesus came and said to them,  All authority in heaven and on earth has been given to me. Go therefore and make disciples of all nations, baptizing them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 and teaching them to obey everything I have commended you. And surely, I am with you always to the very end of the age.

마 15장, 예수는 이방인을 배척하셨나?

이방 여인 하나이 와서 귀신들린 딸을 고쳐달라 했을 때, 예수님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 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 즉 내 소명이 아니라고 대번 거절하신다. 심지어 ‘개들도 부스러기는 먹지 않느냐’는 거듭된 간청을 듣고 나서야 고쳐 주신다.

여인은 지나치게 비굴하고, 예수님은 전에없이 쌀쌀맞다. 왜 그러실까?

원래 예수님은 낮은 자와 함께 하셨다. 어린 주님은 말 구유에 눕히셨고, 동방의 이방 점술가와 들판의 낮은 목자들이 와서 경배했다. 변두리 나사렛에서 자라셨고, 제자들은 어부와 세리였다. 주님은 부자 권력자가 아닌, 병자와 여인들, 죄인과 함께 하셨다. 이것이 주님의 행동의 전형이었고, 이런 비주류적인 모습은 당대 주류 유대인에게 큰 충격이 되었다.

그런데 왜 주님은 하필 이 비주류 여인의 부탁은 들어주지 않으셨을까? 주님은 우선순위에 대해 말씀하신다. 3년 이라는 짧은 시간에, 주님은 제자를 만나 훈련시키고 복음을 선포하시며, 십자가를 지셔서 인간의 죄를 갚아 구원의 사역을 이루셔야 했다. 부족한 시간 중에,온갖 병자를 고치며 메시야인 표적을 보여주시기 위해 병자를 고치셨다. 병원을 차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구원하시려 오셨다.

구원의 우선 순위가 있다. 집중해야 할 사역이 있어서 거부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고쳐주신 것을 기억하자. 이 여인 뿐 아니라, 로마 백부장의 기도도 들어 주셨다. 백부장의 기도는 그의 종을 고쳐달라는 것이었다. 로마 이방인, 압제자 백부장, 그의 종의 병을 고치셨다. 사실 병자에게 손을 대는 것, 안식일에 고치시는 것, 사마리아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조차 터부시 되던 행위였따. 그럼에도 주님은 약자들을 가까이 하셨다. 이렇게 자상한 분이 시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 때에, 단지 전략상 이유로 먼저 유대인들과의 대화에 집중하신 것이다. 이방인 전도는 오순절 후 오신 성령님과 함께 하는 제자들의 할 일이었다.

당시 상황을 다 고려하지 않고, 마태복음 15장 24절만 보고 쌀쌀맞은 예수님이 이방 여인의 간청을 물리치셨다고 오해한다. 예수님의 사역과 이스라엘의 사정을 살피면 오해가 풀린다. 사람들은 바울도 이런 식으로 오해한다. 여성들더러 교회에서 잠잠하고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했다며 이는 바울이 여성의 인권을 무시한 것이라 바울을 성토한다.

그러나 2000년 전, 시골 나라에서 여성인권, 노예해방, 빈부격차해소, 환경보호는 너무 먼 이야기다. 예수님과 바울의 소명과는 동떨어진 주제였다. 사실 중동은 지금도 여성의 인권이 보호받지 못한다. 노예해방, 여성인권이 보장된 것은 미국에서조차 불과 100년이 채 되지 못했다. 예수님 이후 1900년동안 거의 모든 남자들이 남성우월론자였고 인종차별주의자였다. 그런 세상이었다. 역사적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예수님과 바울을 성토하는 것은 부당하다.

비록 복음이 소개된 곳에는 여성의 인권이 신장되고, 노예가 해방되고, 가난한 자가 존중받고 심지어 동물의 생명을 존중하는 유익이 나타난다 할 지라도, 이는 복음의 부수적 효과다. 먼저 복음이 전해져야 이 유익이 나타날 수 있다.

예수님과 바울의 소명은 먼저 하나님의 복음을 이 땅에 전하는 것이었다. 핍박받는 교회를 세욱고, 지키며, 가르쳐서 이 땅에 복음을 전하는 굳은 신앙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사도의 소명이었다. 사도가 소명 외의 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고 비난 하는 것은 부당하다.

교회의 우선순위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이 땅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신앙 공동체를 이곳에 세우는 것이다. 복음을 선포하고,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며, 신자들을 교육하고 훈련하여 성장하게 한다. 불신자들의 곁으로 다가가 필요를 채우고 복음을 전하고 위로한다. 이 과정 중에 당연히 좋은 영향이 미칠 수 있겠다. 환경이 개선되고, 격차가 해소되고, 혜택이 많지 받지 못한 사람이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교회의 우선순위는 복음전파와 하나님 나라의 일에 힘쓰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때로는 사양할 줄 알아야 한다. 우선순위에 먼저 집중하자. 내가 생명 안에 거하고, 가족이 살고, 이웃을 섬기며, 더 넓게 영향을 미쳐가는 순서다. 먼저 가까운 이웃에게 우리의 존재가 생명과 기쁨이 되게 하자. 그 후에 더 많은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돕는자가 되자. 할 수 있는 대로, 하나님의 명을 따라, 힘 닿는 대로 주의 나라와 이웃을 섬기자.

(마 15:21-28)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 14장, 두려워도 둔해지지는 말자

1 갈릴리 호수는 워싱턴 호수의 절반 길이지만 너비는 네 배다. 총 넓이 두배다. 워싱턴 호수를 반으로 접은 것을 옆으로 넷을 늘어놓으면 크기가 비슷하다. 큰 호수라 가끔 파도가 심하게 인다.

2 본문의 사건은 두가지다. 먼저 주님이 바다를 건너신다. 서양의 현대 무신론자들은 신적능력에 대해 의구심을 가진다. 그러나 동양의 신자들은 종교에서 일어나는 기적현상에 대해 익숙하다. 타 종교에도 기적이 일어난다.

우리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며 나의 주로 믿고 고백하는 이유는 단지 그가 행하신 기적 때문 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시고 지금도 그를 믿는 제자들 가운데 기적을 베푸심을 믿는다.

3 둘째 사건은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것이다. 예수님이 명하시니, 심지어 보통 인간인 베드로도 물 위를 걸어 갈 수 있었다. 단 몇 걸음이지만 예수님처럼 성공적으로 바다 위를 걸어서 기적의 일부가 되었다. 이처럼 신자도 주님과 동행하며 물 위를 걷는 것 같은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 우리 뜻대로가 아니라 주님이 명하시면 기적 사건의 일부가 된다. 간증이 많다.

4 그러다 물살을 보고 무서워 하여 빠지기 시작했다. 살려달라 외치니 주께서 손을 내밀어 건지셨다. 문제는 베드로가 무서워했기 때문이다. 31절에서는 주님이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말하신다. 무서운 것을 보고 무서워했는데 무엇이 잘못인가? 그러나 주님이 책망하신 것은 무서워 하는 감정이 아니었다. 믿음이 작은 것을 책망하신다. 대체 주님이 원하시는 믿음이란 어떤 믿음인가? 삼위일체 신앙? 죄사함의 믿음? 부활의 믿음?

5 같은 사건을 기록한 요한복음 6장에선 제자들의 둔한 마음을 책망하신다. (요 6:52)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풍랑을 보고 무서워 한 것 보다 더 큰 문제는, 배 타기 전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신 주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무서움에 자신을 내어 맡긴 제자들의 모습이다. 이런 마음이 둔하다 책망받는다. 기억하지 못함, 두려움에 휩싸임, 물에 빠짐, 작은 믿음이 하나로 연결된다.

6 쉽게 잊는 우리가 행하는 매일 묵상과 주일 예배와 설교의 목표 중 한가지가 바로 이전에 하신 하나님의 크신 일을 ‘다시 기억하기’ 위함이다. 설교자는 바로 이렇게 하신 주님의 능력을 기억하도록 돕는 역할이다. 둔해진 마음을 깨치고 물위를 걸으신 주님을 본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듯이, 주님의 능력을 다시 기억할 때 깨어 있는 제자가 된다.

7 무서울 수는 있다. 그러나 믿음이 작아져서는 안된다. 풍랑이 일어도, 우리는 오병이어 기적의 주님의 능력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순간이 온다. 그러나 기적을 행하시는 주님을 잊지 말자. 물론 무서울 수 있다. 안심하고 두려워 말자. 마음이 둔해지지 말자. 원하신다면 능히 우리로 하여금 바다 위를 걷게 하실 능력의 주님을 기억하자. 떡 떼시던 기적과 신비로운 주님을 기억하자. 주가 행하신다. 둔해지지 말자.

(마 14:22-33) 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마 13장, 자유주의 신학은 무엇인가?

200년 전 유럽에서 시작된 자유주의 신학을 호환 마마 불법비디오 같이 여기는 때가 있었다. 공과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 자유주의 신학의 특징을 1 저자/연대문제, 2 문서설, 3 비신화화 로 정리할 수 있다.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저자와 저술 시대를 전통적인 이해와 달리한다. 모세오경을 모세가 쓴 것이 아니고, 포로에서 돌아온 뒤에 쓴 작품으로 본다. 돌아 간 뒤에는 율법을 단연코 잘 지키리라고 맹세하던 귀환 이스라엘의 심정으로 보면, 지루한 신명기의 율법도 절절한 신앙고백이 된다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문서설은 독일 의사가 발견한 것인데, 성경에 하나님 부분과 여호와 하나님 부분이 있음을 지적한다. 성경 편찬자들이 구전으로 내려오던 성경을 집대성 할 때, 서로 다른 이야기 스타일이 있음을 발견하였고, 하나님(엘로힘)이 등장하는 문서를 E 문서, 여호와 부분은 J 문서, 율법부분은 D 문서, 제사장 업무 수첩 같은 내용은 P 문서로 구분하였다. 각 문서가 특징과 가치가 있어서, 어느 하나를 취사선택하지 않고 모든 문서를 시대별로 적절히 다 넣어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이 주어가 된 부분은 간략하고 조직적이고 요약과 같다. 2~4장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야기는 기승전결 우여곡절 감정이입이 많고 세부사항이 많다. 하나님과 여호와 하나님의 차이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다.

비신화화는 산업혁명과 근대화 전후 등장한 무신론자들에게 성경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오랜 신화 같이 비합리적 비과학적으로 보이는 성경의 많은 기적을 배제하고 기독교의 중심을 전하자는 시도다. 어떤 이에게는 이런 비신화화 작업이 하나님을 믿는데 도움이 되었다.

오병이어 본문을 보면서도 예수님의 능력과 기적을 배제하고 읽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요한복음 6장에는 한 어린아이에게 떡과 물고기가 있었다 기록한다. 이를 토대로 한 아이가 자기가 먹을 도시락을 내어 놓으니, 사람들이 이에 감동받아 저마다 자기 도시락을 내어 놓아 모두가 함께 먹고 풍성히 나누었다는 나눔의 기적이 오병이어의 진실이라고 해석한다.

자유주의 신학이 가치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문을 건성으로 읽는 것은 중대한 약점이다. 이미 앞에서 빌립과 제자들은 5천명을 먹이려면 ‘조금씩 나눠 먹더라도’ 200데나리온이 부족하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이천만원 정도 식대가 필요하다고 계산하며 고민했다는 점은 간과한다. 비신화화 한다고 하여 기적을 기적이라고 부르지 못하니, 성경 본문을 띄엄띄엄 읽게 된다. 결론이 아무리 그럴 듯해도, 본문에 정확히 기초하지 않는 해석은 사람의 말에 불과하다.

자유주의 신학이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 또한 그 한계도 있다. 자유주의 신학을 무서워 하지 말고, 백안시 하지 말고, 맹신하지도 말고, 한 손에 성경과 한 손에 신문과 책을 들고 여러가지 유익한 도구를 다 습득하는데 게으르지 말자.

끝으로 오병이어의 부스러기에 대해 묵상해보자. 다 먹고 난 부스러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 주님은 이를 버리지 말고 잘 간수하라고 하셨다. (요6:12) 길을 가면서 제자들과 함께 먹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기적을 베푸시는 주님이 평시에는 이 부스러기를 먹으면서 가셨다. 주님이 우리를 기적으로 살리실 때가 있다. 그러나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부스러기를 먹으며 걸어가라고 하실 때가 있다. 그러다 또 필요하시면 퍽퍽한 우리 삶에 오병이어 풍성한 기적을 베푸실 것을 기대하며 따라 가자.

(마 14:13-21) 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1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17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18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20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요 6:3-13) 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마 13장, 값진 진주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0) 비유를 읽는 법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밭주인에게 알리지 않고, 자기 소유를 팔아 그 밭은 산 비유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합니다. 물론 주인에게 보물의 존재를 알리지 않아도 밭거래는 불법은 아닙니다. 그러나 윤리적으로 정당한지에 의문이 듭니다. 이웃의 밭이라면 더욱 보물의 존재를 알렸어야 하지 않을까 고민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는 그런 식으로 읽으면 안됩니다. 누가 ‘양식만 먹다가 김치를 먹으니 참 좋다’ 말했다고 합시다. 이를 ‘김치를 먹는 그는 채식주의자이다’ 또는 ‘빨간 김치를 좋아하는 것을 보니 붉은 악마 축구를 좋아한다’는 식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만약 대입시험의 지문을 이런 방식으로 해석하면 ‘지나치게 깊이 생각한 오류’라고 말할 것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유를 통해 말하시려는 그 중심 의미가 중요합니다. 그 외의 것을 생각하느라 지나치게 깊이 생각하면 길을 잃을 수 밖에 없습니다.

(1) 지금 즉시

아주 귀한 것을 발견한 사람은 ‘즉시’ 돌아가 자기 ‘모든 재산’을 다 팔아 그 땅을 삽니다. 좋은 진주를 발견한 사람은 ‘즉시’ ‘자기 모든 소유를 팔아’ 그 진주를 확보합니다. 세상이 그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귀한 진리를 만난 사람은, 생각하느라 질질 끌지 않고 즉시 행동에 옮깁니다. 머뭇거리는 순간 물건은 다른 이에게 팔립니다. 기회가 늘 있지 않습니다. 그 가격이 얼마가 되었든 자기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즉시 확보하고야 맙니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거래를 마무리하는 순간, 엄청난 이익을 볼 것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난 복음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죄인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와 만나는 순간이 있었다면, 그 순간은 바로 진주장사가 생애 최고의 진주를 만난 운명의 시간입니다. 대학에 들어간 뒤에, 아이들 다 키우고 나서 여유가 생기면 그 때 믿어보겠다 하면 늦습니다. 우리는 다행히 그 진가를 알아보고, 자신의 전재산보다 소중한 영혼을 내던져, 주님을 주인으로 모셨습니다. 조금이라도 머뭇거렸다면 그와 만나는데 무척 오랜 시간이 걸렸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주님을 선택했습니다. 다행입니다.

(2) 내 소유 전부

집을 다 팔아 보석을 샀습니다. 집을 어떻게 하루만에 다 팔 수 잇는가, 보석 사고 남은 돈은 무엇을 할지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이미 말했습니다. 그가 가진 가장 큰 재산과 바꾸어 살 정도로 값진 보석입니다.

내 삶의 일부만 드려 기독교인이 된다거나, 한 발을 이 땅에 두고 한 발만 예수님께 두는 식으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최고의 보석 진리를 얻으려면, 온 몸과 인생을 다 드려야 합니다.

(3) 그 보석 전부

내가 보석을 살 때, 보석의 일부만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신 거룩한 예수님은 좋은데, 인간적인 예수님은 제외하고 반쪽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다 좋은데,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유일한 진리라는 독선만 없으면 좋겠다는 사람은 아직 예수님을 다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 우리는 참 진리이신 주님 전체를 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4) 보석을 가진 자

고린도후서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모든 것과 바꿀 만한 귀한 주님을 모신 여러분, 이 값진 보물을 소중이 다루십시오. 이 믿음은 다른 사람은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땅에 묻어두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다행히도 이 가치를 알아보고 이 진리를 획득했습니다. 귀히 모셔 두고, 대접하고, 보존합시다. 아무도 우리 행실 때문에 우리가 간직한 진주의 가치마처 깎아내리지 못하게 합시다. 이 귀한 보물을 품은 그릇인 여러분, 이 가치에 합당하게 살아갑시다.

마 13장, 당분간 가라지도 함께 있답니다.

마태복음을 통해 우리는 천국에 대하여 더 많이 배울 수 있습니다.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 주님은 하나님이 만드신 이 땅에 사탄이 뿌린 악한 자의 자녀가 함께 자라다가 마지막 때에 심판하여 곡식을 추수하신다 풀어 주십니다. 이 비유에서 놓칠 수 없는 것이 좋은 곡식과 잡초의 유사성입니다. 이 유사성 때문에, 일꾼이 잡초를 뽑다 곡식까지 다칠까 봐 주님은 추수 때까지 김매기를 미루십니다. 우리 교회 안과 주변에 유사 기독교, 비슷한 가짜 신앙이 횡횡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곡식과 가라지 비유는 어떤 위로를 줍니까?

1. 교인이라고 무턱대고 믿어서는 안됩니다. 모든 신자 안에 성령께서 살아 계시지만, 모든 신자들이 항상 성령으로 충만해 있지는 않습니다. 비슷해 보이는 잡초같은 신자, 가라지와 같은 운명이 될 종교인, 모양만 같은 교회, 유사 종교를 주의하십시오.

2. 교회의 거룩함을 추구하되 기대하지는 마십시오. 청교도가 이 땅에서 지상낙원을 건설하려다 실패했습니다. 순결한 교회를 꿈꾸되, 교회의 혼란을 보고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교회는 병원 같아서, 의사, 간호사, 간병인 외에도 외래환자, 중환자, 응급환자, 보호자, 구경꾼, 사기꾼이 다 모여 있습니다. 주님은 이런 병자를 위해 오셨습니다.

3. 낙심하지는 마십시오. 이 비유를 알려주신 것은 우리가 절망하여 낙심하고 포기하게 하심이 아니라, 경계하며 소망가운데 천국길을 계속 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어지는 비유에서 천국은, 나중에는 크게 자랄 겨자씨와 같다고 했습니다. 느끼지 못해도 천국은 조금씩 자라고 있습니다.

4. 작은 변화와 성장을 기뻐하십시오. 당장 천국의 성장을 실감하지 못해도 천국은 자라고 이깁니다. 우리는 천국에 날로 가까워 집니다. 생활에서 믿음으로 이긴 작은 승리와 변화를 기뻐하고 축하하십시오. 천국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워 질 것 입니다. 생명의 영이신 주님의 성령이 함께 하셔서 이 길을 쉽게 걷도록 도우십니다.

13:29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31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 13장, 천국 길의 장애물

씨 뿌리는 자를 통해 본 천국가는 우리를 방해하는 것들을 생각해 봅시다.

1. 영적인 장애 – 복음으로부터 소외된 존재 – 타종교인 불신자인 등은 나면서부터 천국과 멀어진 상태입니다. 무신론자 부모 밑에서 자라거나, 미전도 오지에서 태어난 경우는 어쩔 수 없이 복음과 먼 상태입니다. 마치 새가 와서 씨를 먹어 치우는 것처럼 복음이 발붙일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2. 환경적 장애 – 살면서 마주치는 박해, 인생의 어려움으로 넘어집니다. 어떤 이의 간증을 들어보면 아주 어려운 때 하나님을 찾는다지만 사실상 드문 경우죠. 불신가정에서 어려움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기독교에 관심을 갖기란 쉽지 않습니다. 마치 돌밭에 뿌린 씨처럼 뿌리내기리 어렵습니다. 환경의 어려움은 있던 믿음마저 마르게 하는 경향이 큽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을 당할 때는 더욱 주를 찾고 말씀에 붙어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3 내면의 장애 – 한번 씨가 뿌리를 내렸더라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 신자의 성장을 막는 가장 대표적인 장애물로 등장한 것은 이생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입니다. 내일 일에 대한 두려움, 더 많은 돈과 힘을 향한 유혹이 불쑥 솟아오릅니다. 오는 유혹을 막을 수는 없지만 방치하면, 들을 점령한 블랙베리 가시처럼 온통 땅을 덮어 어떤 다른 식물이 자랄 수 없는 황무지가 되게 합니다. 물론 블랙베리에 점령당한 밭도 멀리서 보면 신선한 푸른 색입니다. 멀리서 보면 멋진 자연인데, 날것 그대로의 접근할 수 없고 추수할 것 아무것도 없는 빈 땅인 것처럼 내면이 황폐한 신자는 열매맺지 못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귀한 말씀의 씨를 받고 보존하여 지금까지 이를 수 있었습니까? 이야말로 신비로운 기적입니다. 아무나 깨달을 수 없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비유입니다. (16절) 즉 씨가 뿌려졌다고 해서 모두 결실하지 않습니다. 깨닫고 보고 듣고 깨닫는 기적은 아무에게나 주어진 특권이 아니므로, 사탄과 환경과 내면의 고민이 우리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이 귀한 믿음의 싹을 잘 가꾸고 돌보아 갑시다.

마 12장, 우리를 받아 주셨듯이

제자들이 길가다 안식일에 밀이삭을 뜯어서 먹은 일로 바리새인이 비방했을 때, 예수님은 인자는 (율법의 종이 아니라) 안식일의 주인이라 하셨습니다. 또 안식일에 손 마른 병자를 고치시는지 아니면 안식일 규례를 잘 지키는지 지켜보는 바리새인의 시선을 아시고도, 주님은 ‘안식일이라도 마땅히 위기에 처한 양을 구조해야 한다’고 일축하시고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회당에서 나간 그날, 안식일 오후에 수많은 병자를 고치십니다. 오늘은 안되고 내일 오라고 돌려 보내지 않고, 즉시 도움의 손길을 내어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는 이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위리 곁의 연약한 자들이 주님께 나올 때 우리 기존신자들은 바리새인이 되어 그들 앞에 장애물을 놓지는 않습니까? 말로는 모두 환영한다고 하지만, 정작 술, 담배, 장애인, 동성애 등 다양한 이슈들이 무서워 내심 주저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생각합시다. 주님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병자의 필요를 보았을 때, 즉시 고쳐주셨습니다. 담배를 끊고 난 뒤에 교회에 오라거나, 당신의 삶에서 모든 죄를 회개하고 바로잡은 다음에 교회에 나오라고 밀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부정한 자, 병든 자, 회당에서 환영받지 못하던 사람들에게 기꺼이 손을 내미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님의 행보는 이방인들에게 소망을 주는 복음 방식이었습니다.

만약 주님이 준비된 사람만 만나셨다면 우리는 결코 신자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방인으로서, 하나님과 원수되고, 죄로 죽었던 우리들이야 말로, 가장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가장 갈급한 그 때, 주님은 미루지 않으시고, 다음에 오라고 밀어내지 않으시고, 즉시 우리를 만나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큰 은혜를 입어 신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곁의 이방인, 죄인, 병자, 이웃들을 주님께서 우리를 받아 주신 방식으로 대해줍시다. 누구든지 겸손히 주께 나아와 도우심을 구하면, 사람의 시선과 뒷일을 고려하지 말고, 즉시, 있는 모습 그대로 그들의 손잡아 줍시다. 이해하지 못하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하나님은 이를 기뻐하실 겁니다.

마 12:1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18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마 28장, 두려워 말고 기뻐만하라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보며, 갈 길을 잃은 제자들에겐 대안이 없었습니다. 대안이 없이 막막할 때 우리의 감정은 두려움과 슬픔과, 난처함과 답답함으로 범벅이 됩니다.

일요일 새벽에 두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보기 위해 왔을 때, 지진이 나고, 군병들이 요동하며, 천사를 보았습니다. 간담이 서늘한 새벽에 여인들은 두려웠습니다.

천사의 말은 두려워 하지 말라 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 제자들에게 알리려 달려 가는 여인들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무서움과 기쁨이 교차했습니다.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여인들을 만나 하신 말씀도, 무서워 하지 말라 였습니다.

자기 계획대로 살지 않고 주님의 이끄심을 따라 사는 제자들의 삶은 숭고하지만, 제자들의 마음에는 기쁨과 두려움이 혼재합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무서움과 기쁨에서 무서움을 빼면, 기쁨만 남습니다. 제자의 길은 험하고 곤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쁨으로 그 길을 가기 원하십니다.

마 28: 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9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10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여호수아 1:9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