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적 만남이라는 말이 근거 없고 정체없는 허상임을 아는가?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고, 믿음을 가진 것을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났다고 표현하곤 한다. 80년대 들어 선교단체와 대형교회를 통해 확산된 표현이다. 하나님은 기계적으로 위를 만나지 않고,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면서, 하나님의 그 고상한 인격과 만나서 예수를 영접하고, 내 전인격을 다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바로 인격적 만남이라고 설명해왔다.

그러나 문득 25년째 미국에서 공부하고 번역하고 목회하면서도 그러한 개념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국 어느 책에서도, 인격적 만남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가르침이 없다. 물론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personal 만나는 것이 신앙의 첫걸음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라는 이 단순한 문장을 오직 한국 교회만 ‘인격적 만남’으로 오역해서 사용하며, 원서에는 없는 개념을 덧붙여서 자기 멋대로 은혜받는다는 점에 있다. 인격적 만남이라는 개념이 personal 을 오역했다는 점을 알지 못하면 문제의 원인을 알지 못한다. 인격적 만남이 무엇인지 국어사전을 중심으로 밖에 설명하여 오리무중에 빠지게 된다.

90년대에는 삼위일체 one essence, three persons를 한 본질 세 인격으로 불렀다. 소수만이 괄호 속에서 인격은 오역이며 위격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30년이 지나자 세 위격으로 번역이 고쳐졌다. 그러나 personal relationship 에서 만큼은 이를 개인적 만남으로 번역하는 대신 인격적 만남으로 번역하는 습관이 고쳐지지 않았다. 패커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인격적 만남으로 번역된 모든 문장이 실은 개인적 만남의 오역이었다. 바빙크의 조직신학도 인격적 만남으로 오역했다. 심지어 카톨릭 번역자들에게도 이 습관이 번져, 교황의 메시지도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사귐을 가지라는 평범한 문장을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라는 추상적인 개념으로 번역하고 있다다. 우리가 고쳐야 할 한국교회만의 악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personal 하게 만나자.

첫째, 주님과 개인적으로 만나자. 집단적으로 교회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한 영혼 한영혼 각자 주님을 믿고 구원받아야 한다.

둘째, 주님과 친밀하게 만나자. 사적으로 만나자. 교회를 대표하는 공적인 대표기도도 좋다. 그러나 각자 드리는 사적인 기도를 놓치지 말자. 더욱 친밀하게 주님과 만나 교제하자.

셋째, 주님과 비밀리에 만나자. 공개적으로 만나지 말고 personal하고 은밀하게 만나는 동안 우리의 모든 것을 털어놓고, 주님의 비밀 수업을 받자. 세상이 알 길 없는 개인적인 은혜를 구하자.

정체 불명의 인격적 만남이란 허상을 걷어내고, 개인적으로, 사적으로, 친밀하고, 비밀스럽고, 더 가깝게 주님을 만나자.

(마 28: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Mt 28:7) Then go quickly and tell his disciples that he has risen from the dead, and behold, he is going before you to Galilee; there you will see him. See, I have told you.”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