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기윤실의 요청으로 준비한 글에서 성경에서 찾아본 남북통일의 지혜(환경 허락, 치밀한 준비, 영적인 문제)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새로 출범한 미국 행정부를 바라보며 재미 한인으로서 통일을 위해 어떻게 기도할 지 정리했습니다. [LA 기독교윤리실천운동 2021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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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통일, 요셉의 통일

– 마침내, 가족과 다시 만나려면 – / 김범수 목사

1. 9.11 세대, 6.25 세대

뉴욕 쌍둥이 빌딩이 무너진 지 20년이 지났다. 현장에서 사망한 수천 명의 시민은 물론, 남은 가족들의 상처와 영향을 입은 사업체의 피해는 상당 기간 계속되었다. 당시 내가 속한 교단에서는 그 후 5년 동안 유가족을 위한 상담 및 회복 프로그램을 지원했다고 한다. 테러에 대한 반응으로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 중동전쟁이 벌어졌고, 폭력은 보복을 낳고, 상처는 더 큰 상처를 낳은 악순환이 전염병처럼 번져갔다. 요즘 보이는 중동의 혼란의 근원에 9.11이 자리 잡고 있다고 보면, 큰 틀에서는 9.11 사태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미국에서는 그 후유증이 많이 진정된 느낌이다. 그 해 9월에 태어난 딸은 대학생이 되었다. 학교에서 교과서에서 뉴스에서 해마다 9월이면 언급하는 바람에 딸은 9.11 사태 이후 세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만큼 9.11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성인들이 그날 경험했던 전율과 경악은 딸은 알지 못한다.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지켜본 우리가 겪은 슬픔과 좌절감, 그 깊은 트라우마는 우리 딸에게는 남지 않아서 다행이다.


1945년에 해방된 나라가 어이없이 분단되었다. 50년에 전쟁이 터졌다. 분단은 75년이 지나 76년째가 되었다. 남과 북이 모두 전쟁의 참화를 딛고 일어나기 위해 애를 많이 썼다. 여기까지 회복하는데 오래 걸렸다. 몹시 힘겨웠다. 그동안에도 남은 남대로, 북은 북대로 통일을 향한 기대는 버리지 않았다. 서로 실수와 잘못도 있었고, 화해의 몸짓도 적지 않았다. 이제는 치유도 하고 결국 통일도 하고 싶다. 그럴만한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정작 남한에서는 전쟁의 후유증이 더욱 심해지기만 하였다. 전후 세대들은 매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이 되면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찌르겠다’는 노래를 부르며 ‘그날의 원수를 갚으라’고 교육받았다. 1950년에 태어난 아이가 스무 살이 되어도 상처는 아물지 않고, 더욱 아파졌다. 전쟁 후에 태어난 아이들을 전후세대라고 부르며 전쟁을 알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평화가 아닌, 반공과 교련 등 전쟁을 상기시키는 교육이 주를 이뤘다. 전쟁이 일어난 지 20년이 지난 뒤인 1970년에 태어난 아이도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교련훈련과 반공교육으로 길러졌다. 화해와 평화를 언급하거나, 환경과 복지를 말하면 전쟁의 참상을 경험하지 못한 전후 세대의 철없는 응석으로 치부되었다. 21세기에 태어난 세대는 아예 통일과 더 멀어졌다. 워낙 오랜 기간 헤어진 민족이니 이제 와서 통일이 무슨 대수냐며 북한을 아예 다른 나라로 취급한다. 크게 달라진 남북의 문화와 언어를 들며, 통일비용이 많이 들 터이니, 통일은 생각지도 말고 먼저 청년실업 문제나 해결하자고 한다. 전쟁의 트라우마는 세대를 이어서 증폭되고, 미움은 깊어져 서로 다른 두 나라로 몸뿐 아니라 마음까지 둘로 나누어 버렸다.


세월이 지나며 미국의 9.11 사태는 진정되어가는데, 왜 한국의 6.25 상처는 더욱 아파지는가? 미국은 20년의 일은 교과서 속의 옛날 일이 되어가는데, 한국의 분단은 무려 76년이 지나도록 왜 긴장이 수그러들지 않으며, 한번 벌어진 그 거리가 좁혀지지 않을까?


2. 트럼프든 바이든이든

통일의 당사자는 물론 남과 북이다. 그러나 한국의 분단과 전쟁의 중심에는 미국이 있었다. 통일의 열쇠 중 하나를 미국이 쥐고 있다는 사실은 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잊지 않아야 할 팩트다.그러므로 우리는 몇 년 전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두 차례 협상 테이블에 앉을 때와, 판문점에서 남과 북이 함께, 그리고 남과 북과 미국이 함께 만나는 모습을 설레임으로 지켜보며 통일에 대한 기대를 한껏 품었다. 이번에 출범한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정책과 통일정책에 대해서도 관심이 크다. 미국이 통일문제에 가진 지분과 영향력이 적지 않은 까닭이다.


아직 임기 초반이라 성급히 판단하기는 이르지만 들리는 소식으로는 이 답답한 통일의 전망을 타개할 만큼 신선하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인물이 행정부 요직에 배치된 것 같지는 않다. 현재 기용된 남북정책 담당자 자리가 남과 북의 통일과 화해보다는 전형적인 미국의 외교 원칙에 따라 단기적으로 미국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보수적인 인사들로 채워진 것 같아 다소 실망이 된다. 미주 한인으로서 행정부 고위관료로 진출할 만한 인재의 층이 얇은 것도 문제지만, 미주에서 자란 한인 중에서 남과 북의 현실과 통일의 방향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꿈을 꾸는 사람이 적은 것이 가장 큰 문제다.
바라기는 남북통일의 문제는 남과 북만의 문제가 아니며 남북의 통일은 미국 중장기적인 이익을 도모하는 역사적 사건임을 믿는 관료가 기용되었으면 좋겠다. 남과 북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좀 더 전향적인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미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남북통일을 지원함으로써 미국이 세계평화와 안정을 주도적으로 견인하는 명실상부한 세계의 평화와 안녕을 도모하는 중심국가가 되도록 바이든 행정부를 움직일만한 인재가 나타나면 좋겠다.


비극적인 일이 있었지만 20년을 지나며 9.11의 상처를 점점 복구하였듯이, 곧 76년이 되는 남북 분단의 상처도 치유하고, 멀어진 두 나라가 다시 하나 되는 길로 한발 더 가까워지도록 남북의 화해와 치유, 그리고 한반도의 긴장 완화와 평화가 정착되도록 미국의 손이 움직여 주기를 기대한다.
그러면 이렇게 오랫동안 헤어졌던 형제가 다시 만나기 위해서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통일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성경에서 어떤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
3. 야곱과 요셉의 통일
하나의 민족이 하루아침에 38선으로, 휴전선으로 나뉜 채로 76년이 지난 뒤에 재결합을 꿈꾸는 통일은 어찌 보면 이산가족이 다시 상봉하는 것과 같다. 성경의 창세기에는 오랜 기간 흩어졌던 이산가족이 재회하는 장면이 두 번이나 나온다. 야곱과 요셉 이야기다.


(1) 야곱이 에서를 만나기 전에 창세기의 야곱은 험난한 생을 살았다. 야곱은 간교한 계략으로 아버지를 속이고 형에게 돌아갈 장자의 축복을 가로챘다. 20년간 삼촌 집에서 고생하며 대가를 톡톡히 치르며 자수성가하였다. 가족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얍복강을 만난다. 강을 건너면 형 에서를 만나게 된다. 아직도 동생을 만나기만 하면 죽이려고 이를 갈고 있을지 모르는 형을 만나야 한다. 때문에 형의 환심을 살 만한 좋은 선물을 준비한 선발대를 먼저 보내고, 그 뒤를 따라 가축을 여러 떼로 나누어 이동시킴으로써 자기 재산을 분산 배치한다. 그 뒤에 부인과 아들을 두는데, 이때도 가장 사랑하는 부인 라헬과 요셉을 맨 뒤로 숨긴다. 화해의 과정에 일이 잘못될 경우까지 계산하여 인간적으로 가장 합리적으로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재산과 가족을 일렬로 배치한 것이다. 그날 밤 그는 홀로 남아,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는데, 날이 새도록 진이 빠지도록 매달린다. 끝내 정강이를 얻어맞고 다리를 절게 된다. 그러나 그 집요한 매달림으로 인해 하나님의 축복의 승인을 받고, 간교한 ‘야곱’은 승리의 뜻을 가진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는다,진인사대천명, 야곱은 자기가 가진 잔재주를 다 써서 상봉을 준비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는 영적인 준비까지 마쳤다. 이것이 얍복강에서 절치부심한 야곱의 상봉준비다.


(2) 요셉이 형들을 만났을 때에창세기에 나타난 두 번째 가족 상봉의 예는 야곱의 아들 요셉이다. 요셉은 형들에게 밉보여 이집트 노예로 팔려간다. 마침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서른 즈음에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기근을 해결하는 큰일을 해내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십수 년 간의 노예 생활과 감옥생활 등으로 고생이 심했다. 형제들도 곡식을 구하려 이집트에 와서 총리가 된 요셉과 만나지만 요셉을 알아보지 못한다. 이때 요셉은 형제들을 ‘시험’한다. 형제 중 시므온을 옥에 가두고 인질로 삼고,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야곱의 집에서는 난리가 났지만, 어쩔 수 없이 베냐민까지 이집트로 보낸다. 요셉은 베냐민을 만난 뒤에도 기쁜 마음을 숨긴 채, 베냐민의 자루에 금잔을 넣어 죄를 뒤집어씌우는 방법으로 형제들의 반응을 떠본다. 두 차례 형제들의 간담이 서늘해지는 시험을 치른 뒤에야, 요셉은 자기의 정체를 드러내고 형제들과 화해한다. 용서하는 사람과 용서받는 사람의 감격적인 포옹이 있고 난 뒤, 형제들은 가나안에 돌아가서 아버지 야곱은 모시고 이집트로 이주한다. 야곱은 죽은 줄 알았던 아들 요셉을 십수 년 뒤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3) 남과 북이 다시 만나려면 두 이야기 모두에서 상봉의 조건으로 (1) 환경의 허락과, (2) 당사자의 치밀한 준비, 그리고 (3) 영적인 문제해결이 반복되어 나타난다.


하나님이 야곱의 양떼가 번성하게 하심으로써 야곱을 삼촌 집에서 자수성가하게 하셨고, 타국에 팔려간 노예 요셉을 총리로 만드셔서 곡물을 구하는 형제들과 만나게 하셨다. 한국의 통일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환경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통일은 기대하기 힘들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그 팔을 펴시면 어떤 악조건도 극복되고 분위기가 무르익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국내외 환경을 조성하여 극적인 남북통일의 길을 열어주실 것을 굳게 믿는다.


하나님이 오묘한 섭리 속에 기적적인 도우심이 있더라도 통일이 이뤄지려면 당사자의 치밀한 준비도 필요하다. 야곱이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위기관리 차원에서 소유와 가족을 분산시켰듯이, 요셉이 형제들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서 두 번이나 짐짓 엄한 모습으로 마음을 숨기며 시험했듯이, 통일하는 당사자인 남과 북이 다시 만날 때에는 자칫 자그마한 실수나 사건이 큰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매사에 불여튼튼, 얼음장을 건너듯, 돌다리도 두들겨가며 철저히 준비하며 진행하여야 한다. 이 일을 위해서 통일 당사자 양측이 정성을 모아야 하며, 후유증 없는 바람직한 통일이 되려면, 두 나라의 모든 국민이 각각 한 마음이 되어 통일에 협력하여야 한다.


환경의 허락과 당사자의 준비 외에도 우리 기독교인은 또한 통일에 영적인 측면이 있음을 믿는다. 세상의 역사적 사건 뒤에 보이지 않는 주님의 손길이 있다.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주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모든 도모는 헛것이며, 반대로 주님이 축복하시면, 형제를 만나기 전에, 동이 틀 무렵에 우리는 믿음으로 ‘통일은 이미 되었다’고 선언할 수 있다.


야곱은 이를 위해,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하였다. 간교한 야곱이 형과의 해후를 영적인 문제로 알고 철야기도 한 셈이다. 요셉은 한시라도 빨리 재회하고 싶은 가족 상봉을 잠시 미루고 형제들을 두 차례나 시험한 까닭은, 자신과 형제들 간에 해결하지 않은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기와 복수, 납치와 인신매매, 배신감과 굴욕감, 수치심과 뉘우침 등 문제가 남아있음을 요셉은 보았다. 앙금처럼 남아있는 형제간의 감정적 문제, 관계적 문제,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로는 가족상봉이 의미가 퇴색된다.


무려 76년간 헤어진 남과 북이 만나기 위해서도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문제가 함께 해결되어야 한다. 미국의 9.11 사태는 20년이 지나면서 아픔이 얼마간 무뎌졌지만, 한국의 분단과 6.25 전쟁은 75년이 지나도 상처가 아물지 않고 덧나고 있다. 세월이 지나면서 한 가족이었던 남과 북은 점점 더 멀어졌다. 시간이 지나며 분단의 앙금이 내려앉아 통일의 맑은 물이 떠오를 때가 이미 지났다. 그러나 오히려 시간이 지나며 분단의 앙금은 남과 북 모든 사람의 마음 바닥에 쌓인 채 돌처럼 굳어지고, 반복된 양측의 실수와 오해와 주변국의 이간질로 사이는 더 틀어졌다. 결국 서로에 대한 의심은 증폭되어 분단의 전망은 점점 더 흐려지고만 있다. 둘은 멀어졌다. 이토록 오래 헤어지고, 이토록 멀어진 가족이 다시 만나 평화롭게 같이 살려 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자.


4. 우리의 기도

지난 20년간 미국이 9.11 사태 피해자를 위해 그라운드 제로를 조성하고, 피해자를 추모하고 상처를 보듬었던 노력처럼 남과 북도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길로 나서며 통일을 도모해야 한다. 야곱과 요셉이 화해와 용서를 위해 물적인, 정신적인, 영적인 준비를 하며 화해야 용서를 위해 나아갔듯이, 남과 북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도, 먼저 용서를 위해 한 발자국, 화해를 위해 한 걸음, 상대방을 안심시키는 동작 하나, 마음을 녹이게 하는 한마디 말을 쌓아 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통일을 열망하는 성도들은 이렇게 기도할 것이다.


1.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열방의 지도자들을 움직이시고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서를 변화시켜서 화해와 통일의 분위기를 조성해주시길 기도한다. 하나님이 야곱과 요셉의 운명을 이끄시고 성숙시키셨듯이, 미주한인 2세들 가운데에서 조국의 운명을 애통해하고 통일을 꿈꾸는 미주한인 지도자, 워싱턴 DC와 국제 외교무대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멋진 한인 정치가를 배출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2. 또한 남과 북이 서로를 자극하지 말고, 치밀하고 꼼꼼하게 준비하여 서로를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가도록 기도한다. 더 이상 서로를 자극하지 말고, 상처를 어루만지고 달래주며 적대감을 줄여가기 바란다. 다시 만남이 어렵더라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용기를 내어 작년보다 한 발자국 더 내딛고, 또 한 발 내딛어 마침내 화해와 감격의 포옹을 하게 되는 날이 오도록 기도한다. 무엇보다 남은 남대로 북은 북대로, 양극화와 체제불안으로 마음이 나뉘고 내부 갈등이 심화된 지금, 남북의 각 구성원 모두가 마음을 하나로 하여, 통일에 대해 염원을 모으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희망한다. 의심을 떨치고 다시 만나게 하실 주님을 신뢰하여 통일을 향한 믿음의 발걸음을 떼기를 기도한다.


3. 무엇보다도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현상과 성령의 능력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통일에 작용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준비를 위해서도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오래 묵은 상처를 치유해주시기를 바란다. 증오와 원한을 딛고 죄인을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용서하게 해주시기를 기도한다.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화해와 상봉을 축복하시기를 얍복강 씨름터에 선 야곱처럼 간구한다. 아버지께서 그 자녀들을 한 날개 그늘 아래로 불러모으시듯, 한 울타리 안으로 다시 묶어 주시기를 빈다. 그리하여 한국교회가 오랫동안 기도해 온 성서 한국, 통일 한국의 꿈을 마침내 이뤄 주시기를 기도한다.


너무 멀지 않은 가까운 미래에, 이 지난하고 초조한 상봉을 향한 여정이 끝나기 바란다. 얍복강에서 야곱의 씨름이 마쳐갈 즈음에,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주셨듯,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새로운 이름을 주시길 기도한다. 더 이상 ‘대한민국’도 아니고,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도 아닌 수치와 원한과 증오를 다 씻긴 ‘새 이름’으로 불리게 될 그 날을 바라며 기도한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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